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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Sep 25. 2023

바쁜 일상이란 필름에 여유라는 컷을 끼워 넣다

자취 생활의 균형 찾기

구름 한두 점이 유유자적하게 흘러가는 푸른 하늘이 창밖으로 보이는 아침, 느긋하게 일어나서 가벼운 아침식사를 한 뒤 방안으로 한낮의 햇살이 깊게 들어오면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다. 테이블에는 따듯한 밀크티를 담은 머그잔이 놓여있고 창을 너머 간간이 세상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어쩌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흐린 하늘이 쏟아내는 빗줄기를 보며 서늘해진 몸에 카디건을 걸치고 저녁식사로 따듯한 국물을 차린다. 여유롭고 훈훈하기만 한 생활은 자취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상상하던 장면이다.


자취의 실상은 상상과 다르다. 한낮에는 대부분 회사에 있고 저녁이 되어서야 귀가하는 생활 패턴 속에서 따듯한 햇살을 쬐며 소파에 앉아 있을 수 있는 날은 주말뿐이다. 창밖의 세상 돌아가는 소리가 아니라 마우스와 키보드 소리만 들리는 회사 사무실에서 잠을 깨고자 커피를 마신다. 갑자기 비가 내리는 날에는 창문을 닫고 왔는지 걱정부터 되고 장마가 지속되면 빨래는 마르지 않거나 다 말라도 석연치 않다. 쉰 내라도 날까 봐 에어컨을 틀거나 선풍기를 빨래 건조대 쪽으로 돌려놓으며 빨래에게 여름철에 할 수 있는 최고의 호강을 시켜주는 것, 이것이 자취의 현실이다.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9 to 6 근무를 주 5일 하는 직장인이라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지 않다. 퇴근과 출근 사이 씻고 잠만 자는데도 할 일은 뭐가 이렇게 많은지. 퇴근 후 매일 청소기를 밀고 있으면 바닥이 머리카락을 복제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터무니없는 의심마저 든다. 이제 집에 나밖에 없으니 엄마나 언니 머리카락이라고 우길 수도 없지만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전부 내 머리에서 떨어졌다는 것 또한 믿을 수 없다. 빨래를 줄일 수는 없으니 설거지라도 줄여보자는 마음으로 주중 저녁은 최대한 간단하게 해결한다. 조리가 필요 없는 식사를 고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시리얼로 손이 간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대청소는 시간적 여유와 체력을 고려해서 주말 중에 해치운다. 가장 먼저 화장실 청소부터 하고 마지막으로 쓰레기를 내다 버다. 여름이면 초파리가 왜 이렇게 많이 생기는지 일반쓰레기봉투는 10리터짜리를 사서 자주 갈아주는 수밖에 없다. 과일 껍질이나 채소를 다듬으며 생긴 음식물 쓰레기는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넣고 입구를 돌돌 말아 냉동실에서 얼려버린다. 일 인분의 요리를 만들면 일 인분의 쓰레기가 나오기 때문에 제일 작은 종량제 봉투를 사도 늘 공간이 남는다. 앞으로 내가 먹을 음식물과 쓰레기가 같은 칸에 있는 것이 꺼림칙할 때도 있지만 그것도 잠시뿐, 부패하지도 않은 데다 과일 껍질과 채소 잔여물 정도는 '깨끗한 쓰레기'라는 합리적인 논리를 완성한다.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바쁘지만 나의 모든 시간을 유지하는 데만 쏟는다면 억울했을 것이다. 충전이랍시고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을 조금만 줄여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 시간을 쓸 수 있다. 추위가 사그라들고 날이 따듯해지자 평일 퇴근 후에는 가까운 공원을 걷거나 달리며 간단한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시간을 벌기 위해서 자취를 시작한 것이 아닌가. 내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다면 굳이 안락한 부모님의 둥지를 떠나 은행에 이자까지 내며 사는 보람이 없다.


원래도 아침잠이 많지 않은 편이라 주말에도 7시 반이면 눈이 떠진다. 전날 아무리 피곤했어도 9시를 넘겨서 늦잠을 자는 날은 거의 없다. 주말이면 친구와 약속을 잡기도 하지만 대체로 이틀 중 하루는 집에서 보내려고 한다. 그런 날은 집에서 혼자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하나씩 도전해 본다. 글을 쓰거나 뭔가를 만들어볼 때도 있지만 대부분 요리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로써 요리가 새로운 취미로 급부상할 수 있었다. 군것질이 하고 싶을 때면 간단하게 베이킹 믹스를 사다가 스콘이나 케이크를 만들어본다. 실리콘 주걱으로 반죽을 휘젓고 있으면 내가 꿈꾸던 자취생활의 한 장면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자취를 꿈꾸며 내가 상상하던 모습은 어느 삽화의 한 장면과 다르지 않았다. 자취를 하지 않았을 때는 상상 속 한 컷이 전체의 압축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한 컷은 단지 수많은 시간의 한 순간을 포착한 것뿐이라는 것을. 삽화 같은 순간을 보낼 때도 있지만 내가 보내는 무수한 시간은 더 많은 일과 감정들로 이어진 한 줄의 필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삶에는 균형이 필요하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맞춰가며 살아가는 것. 자취에 있어서도 균형이 중요하다. 현상 유지를 위한 일상에만 매몰되어서도 안 되지만 여유로운 오후의 햇살에만 취해서도 안 된다. 퇴근 후에는 잠시 숨을 고르며 차 한 잔 마시는 쉼표를 찍고, 주말에는 월요일이라는 첫 획을 긋기 위해 머리맡에 펜을 둘 줄 알아야 한다. 쉼표만으로 이루어지는 문장도 없고 획으로만 이루어지는 문장도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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