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레스트 검프>로 본 장애의 스테레오 타입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 당신이 무엇을 고를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 대사는 ‘죽기 전 봐야 할 영화’로 손꼽히는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 1994)에 등장한다. 국내와 국외 모두에서 큰 흥행을 누린 <포레스트 검프>는 2016년 재개봉을 했을 만큼 ‘휴머니즘 영화’로 평가받으며 ‘명작 대열’에 올랐다. 톰 행크스가 연기한 캐릭터 ‘포레스트’는 ‘장애에 굴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물’, ‘다소 모자라지만 숭고한 가치를 지닌 사람’, 심지어는 ‘삶의 진리를 체득하고 있는 천재’로까지 평가받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인생 캐릭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포레스트 검프>가 ‘장애’를 현명하게 다루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인데, 포레스트와 같은 ‘장애인 캐릭터’는 많은 영화에서 그 전형적인 특성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무언가를 떠올릴 때 그것에 대해 저절로 그려지는 이미지와 관념을 ‘스테레오 타입(stereotype)’이라고 부른다. ‘틀에 박힌 사고방식’으로 번역되는 스테레오 타입은 특정 대상이나 집단을 향한 고정관념을 강하게 형성할 수 있기 때문에 현실 속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러한 스테레오 타입이 '장애인'을 향할 때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포레스트 검프>에 나오는 두 인물, ‘포레스트’와 ‘댄’을 통해 알아보자.
*본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포레스트는 지적장애를 가진 인물이다. (많은 영화 줄거리에서는 ‘남들보다 조금 떨어지는 지능을 가진 소년’이라는 식의 표현을 쓰고 있지만, 이런 식으로 장애를 돌려서 말하는 경향은 장애를 ‘말하기 꺼려지는 것’,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하는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므로 본 글에서는 포레스트가 지적장애인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영화 초반에 포레스트는 걷는데 불편함이 있는 하지 장애인이었지만 우연한 계기를 통해 완치되고, 더불어 ‘빠른 달리기 능력’이라는 자신의 비범함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포레스트의 비범함은 그의 ‘순수함’과 함께 역경을 이겨내는 장치로 작용한다. 포레스트는 빠른 달리기 능력을 활용해 미식축구 선수로 우수 졸업을 하고 베트남 전쟁에서 무공훈장을 받고 국제 탁구 선수로까지 활약한다. 이 과정들은 모두 우연을 비롯한 포레스트의 달리기 능력, 그리고 ‘앞만 보고 나아가는’ 포레스트의 순수한 성격이 작용한 결과이다. 어떤 꼼수나 시대적인 인지 없이 ‘무식하게 돌진’하는 포레스트의 개인적 속성이 일련의 행운으로 작용하면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스토리 진행은 포레스트의 지적장애가 그의 삶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순수하고 비범한 장애인’이라는 캐릭터는 장애를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하는 ‘슈퍼 장애인’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을 강화할 수 있다.
‘슈퍼 장애인’은 슈퍼맨처럼 ‘무엇이든 다 이겨내는 장애인’을 의미한다. 이러한 슈퍼 장애인 캐릭터는 장애를 다룬 영화는 물론 현실에서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히말라야 등반에 도전한 지체 장애인’, ‘세계적인 음악가가 된 청각장애인’ 등등 ‘장애를 극복하고 대단한 무언가가 된 사람’에 대한 스토리는 많은 휴먼 다큐나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치 ‘흑인이 대학에 합격하다’라는 식의 이러한 ‘성공 스토리’는 장애인이 겪는 사회적인 차원의 문제를 망각하고 ‘극복’의 책임을 개인에게 강요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물론 장애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과 차별, 개인적인 고난들을 이겨낸 사람들은 찬사를 받을 가치가 있다. 하지만 세상에 천재보다는 범인이 많은 것이 당연하듯, 비범한 장애인보단 그렇지 못한 장애인이 더 많다. 그리고 이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개인의 ‘능력 없음’이 아니라, 사회의 잘못된 인식과 부실한 복지 제도이다. 이러한 점에서 포레스트가 자신의 비범함으로 모든 고난들을 ‘우연히’ 이겨내는 과정은 다소 ‘힘 빠지는 이야기’로 느껴진다. 비범한 능력도 행운도 없는 사람들에게 이 사회는 너무나 버겁기 때문이다. 그러니 개개인이 ‘슈퍼맨’이 되길 강요하기보다 ‘슈퍼맨이 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먼저 꿈꿔야 하지 않을까?
한편 포레스트의 ‘순수함’은 그의 소꿉친구 ‘제니’와의 사랑에 있어 이중적인 역할을 하는데, 포레스트는 매번 자신을 떠나가는 제니를 항상 기다리는 지고지순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제니를 향한 포레스트의 사랑은 종종 ‘폭력’의 형태로 드러난다. 포레스트가 제니를 함부로 대하는 남성들을 폭력으로 응징하는 장면은 그의 ‘순수하고 한결같은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아버지의 학대를 겪으며 자라난 제니가 주점에서 노래를 부르다 희롱을 당하자 포레스트는 그 남성에게 폭력을 가하고, 제니를 함부로 다루는 남자를 주먹으로 때리거나 제니가 남자 친구와 스킨십을 하는 장면을 잘못 오해해서 그를 때리기도 한다. ‘폭력’으로 사랑을 강조하는 이러한 서사적 장치는 지적장애인들의 순수함을 과도하게 강조하거나 왜곡하는 것으로 오히려 지적 장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포레스트 검프>에서처럼 장애를 폭력에 대한 ‘면죄부’처럼 활용하는 서사 전략은 다수의 미국 문학과 영화에서 활용되고 있는데, 이는 비장애중심적 사고와 남성중심적 사고가 혼합되어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포레스트의 지적장애가 ‘좋아하는 여자를 지켜주는 남자’라는 고정된 성 관념과 만나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비록 영화 속 장면이라고 해도 잘못된 재현 방식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은 실제 지적장애인과 정신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 공포감을 심어줄 수 있으며, 실제 장애인의 삶을 왜곡하는 행위는 단순히 ‘편견’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정체성 자체를 혐오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장애를 다룬 영화가 그 재현의 방식을 오래, 또 깊이 숙고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영화가 혐오를 조장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없는 ‘악’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포레스트 검프>가 혐오를 조장했다거나 ‘악’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더 나은 이야기를 할 권리’가 있기에, ‘명작’이라는 이유로 영화가 말하는 방식을 그대로 답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더 나은 이야기’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잘못 말해왔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포레스트 검프>에 나온 또 다른 장애인 캐릭터 ‘댄’ 이야기를 다음으로 다루며, 이야기의 과정에 계속해서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우충완(2017)「장애재현의 한계와 가능성-임권택의〈안개마을〉(1982)을 중심으로」세한영어영문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