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약함이 우리에게 하는 말-영화 <남편이 우울증에 걸렸어요>
몇 주 전 친구들과 ‘마리오 파티’ 게임을 했다. 주사위를 굴려 말을 이동시키는데 도착한 위치에서 문득 폭탄 모양의 캐릭터가 튀어나왔다. 무해한 얼굴에 폭탄병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을 단 녀석은 이렇게 말을 걸었다. “도움은 안 되겠지만 같이 가도 될까?” 그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내 꽁무니에 따라붙어 주사위를 굴릴 때마다 마이너스를 붙여댔다. 뭐야, 이 쓸모없는 자식! 하고 욕했지만 민폐만 끼치는 하찮은 모양새가 어쩐지 측은했다. 나는 아마도 묘한 동질감을 느낀 것 같다. 애매하게 발목을 붙잡는 귀찮은 악역. 증오하기엔 너무도 미미한 조연 중에서도 조연. 나는 그 폭탄이, 꼭 나 같았다.
하라는 게임은 안 하고 이상한 데 과몰입을 해버린 이유는, 그때의 내가 취약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주기도 전조도 없이 찾아오는 이 시기의 나는 꽤나 음울하고 무능력하다. 글쓰기는 물론이며 계획한 어떤 일도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 무력하게 누워 텔레비전을 보면서 ‘와 저 사람은 나랑 나이도 같은데 벌써 번듯하게 직장도 있네 저 허리 좀 봐 아주 곧다 곧아 거북목도 아니네’ 같은 감탄, 내지는 자책만 주로 한다. 바로 전날까지 희망차던 마음이 고꾸라져버리니, 내가 꼭 다른 생명체처럼 낯설고 난감하다. 앞을 향해 열심히 나아가려는 등에 불현듯 달라붙어 마이너스를 외치는 폭탄병처럼, ‘우울’은 그렇게 노크 없이 찾아온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어요.
영화 <남편이 우울증에 걸렸어요>의 ‘츠레’도 불청객처럼 찾아온 우울증에 마음을 점거당한다. 이유 없는 통증과 무기력, 불면과 식욕부진을 전전하며 츠레는 회사생활을 애써 이어 보지만, 아무리 빗어도 삐져나오는 뒷머리처럼 우울은 야금야금 커져간다. 츠레의 반려자이자 만화가인 ‘하루코’는 굽어져 가는 츠레의 등을 보다 못해 퇴사를 제안하지만 결심은 쉽지 않다. 생활비에 대한 걱정, ‘우는 소리 관두라’는 상사의 역정, 복잡한 퇴직 절차와 인수인계 과정을 겨우 통과한 츠레와 하루코의 앞에는 우울증과의 기나긴 접전이 기다리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괴로울 만큼 생생하게 그 접전을 기록한다. 츠레는 사람들로 가득 찬 지하철에서 거세게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죽은 듯이 한 나절을 잠만 자기도 한다. 어떤 날엔 의욕으로 가득 차 겅중겅중 뛰어다니지만 바로 다음날엔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열을 한다. ‘우울증은 시계추가 왔다 갔다 하듯이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며 조금씩 나아가는 병’이라던 의사의 말마따나 츠레는 하루와 하루의 간극을 오고 가며 우울과의 장기전을 이어간다.
사람들은 츠레에게 ‘가만히 쉬면 금방 나을 거야’라고 말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만히 쉬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병세는 악화된다. 퇴사 후에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달리던 츠레는 친형으로부터 열심히 노력하라는 훈수를 들은 날 ‘뭘 어떻게 열심히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무너진다. 그리고 일에 집중한 하루코가 자신의 말에 날카롭게 반응하자 조용히 욕실로 들어가 목숨을 끊으려 시도한다. 츠레를 그토록 위태롭게 틀어잡고 놔주지 않는 것은 단 하나의 생각이다. 나는 쓸모없다는 생각, 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는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라는 생각 말이다.
아프면 쉬는 것은 당연한데 왜 츠레는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그건 이 사회에서 ‘아프면 쉬는 것’이 당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발전과 성장, 성공을 위해 기꺼이 사람을 ‘갈아 넣는’ 현대 사회에서 질병은 곧 ‘걸림돌’이다. 휴식은 퇴보, 게으름은 해충, 경제적 무능력은 실패이기에 아픈 사람은 죄인, ‘실패자’다. 성공을 위해 밤을 새우고 끼니를 거르면 박수를 쳐주지만 완전히 나가떨어지면 ‘의지’와 ‘정신력’을 따지는 세상에서 츠레는 ‘쓸모없을’ 수밖에 없다. 아픈 사람은 너무도 많지만 그 아픔을 도통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서 츠레는 가만히 쉴 수가 없다.
하지만 다행히 츠레의 곁에는 하루코가 있다. 하루코는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깨지지 않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며 츠레를 기다린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우울증에 대해 고백하며 용기를 전하는 츠레의 모습은 영화를 ‘해피엔딩’의 영역으로 데려간다. 하지만 이 영화를 차마 완전한 ‘해피’로 볼 수 없는 이유도 있다. 만약 츠레가 혼자 살았다면, 병원비를 낼 수 없어 회사를 계속 다녀야 했다면, 회사가 츠레의 병을 존중해주지 않았다면, 츠레의 우울증이 이후 취직에 악영향을 미쳤다면, 그때 츠레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가 말하지 않은 수많은 현실에도 ‘츠레’가 존재하기에, 나는 그들의 엔딩을 질문할 수밖에 없다.
영화가 말하듯, 우리는 누구든 언제든 아플 수 있다. 그러나 ‘잘’ 아프려면 충분한 돈과 시간, 그 시간을 기다려주는 사람과 사회가 필요하다. 자원과 인내심, 그리고 인정이 필요하다. 우리의 취약성에 대한 인정. 우리가 가진 무기력과 무능력에 대한 인정. 우리는 아무 이유 없이 아플 수 있고 무너질 수 있고 그것을 회복하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 그리고 아프고 무너져도, 아무것도 하지 못해도, 살아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가치 있다는 인정. 그것이 필요하다.
하루코는 츠레가 우울증에 걸린 이유보다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약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 루소의 경우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연약함은 우리를 연결시키며, 우리를 사랑으로 끌고 간다고. 하루코가 만화를 그리지 못할 때 츠레가 있었고 츠레가 아플 때 하루코가 있었던 것처럼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랑, 서로의 취약함을 공유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고.* 이 말을 조금 비틀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약하기에 무조건적으로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고. 사랑 앞에 달린 수많은 조건을 지우고 단지 서로의 존재, 서로의 취약성만이 사랑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고. 이 미친 세상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서로를, 그리고 스스로를 사랑해줘야만 한다고.
무조건으로 사랑해주라니. 터무니없는 얘기라는 거 안다. 이런 말을 하는 나도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을 나쁘게 볼 때가 있고 문득 쳐들어온 우울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스스로를 비난하곤 한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내가 했던 그 게임에서 폭탄병은 터지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던지는 주사위에는 0 이하의 숫자는 없다. 즉, 조금 느리게 멈춰가더라도 살아있는 한 우리는 계속 갈 수 있다. 나를 조금은 사랑해줘도 괜찮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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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레는 우울증에 완치란 없음을 연거푸 이야기한다. 산다는 건 그렇게 내가 나라는 사실과 계속해서 싸워야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싸움에 이기고 지는 건 없다. 단지 통과하는 거다. 후, 숨을 고르고 기다리는 거다. 그러면 반드시 온다. 먹구름이 지나가고 지겨운 장마가 그치는 때가.
*"모든 사람은 벌거벗고 가난하게 태어나며, 삶의 비참함, 슬픔, 병듦, 곤란과 모든 종류의 고통을 겪게 마련이며, 종국에는 모두 죽게 된다. (...) 인간을 사회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연약함이며, 우리 마음을 인간애로 이끌고 가는 것은 우리들이 공유하는 비참함이다. (...) 우리 각자가 다른 사람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들과 함께 어울리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무엇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장 자크 루소, <에밀> 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