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레스트 검프>로 본 장애의 스테레오 타입
이전 글에서 이어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 1994)에서 드러나는 장애의 스테레오 타입(stereotype)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 첫 번째 장애인 캐릭터 '포레스트'는 비범함과 순수함으로 고난을 모두 이겨내는 '슈퍼 장애인'의 전형성을 보이고 있었고, 한편으로 포레스트의 순수함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포레스트 검프>를 이야기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인공 포레스트의 삶과 그 의미를 읽어내지만, 본 글은 <포레스트 검프>에서 드러나는 '장애의 재현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에 포레스트가 아닌 또 다른 장애인 캐릭터 '댄 테일러'(게리 시나이즈)의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댄 테일러 중위는 포레스트가 베트남 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했을 당시 만났던 상관이다. 잘생긴 얼굴과 근육질 몸매, 당당한 태도로 처음 등장한 댄 중위는 '전쟁에 승리하겠다'는 일념으로 부대를 이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전투 당시 폭발 사고로 두 다리를 잃었고, 그대로 전장에서 죽으려 하는 댄 중위를 포레스트가 살려냈다. 두 다리를 절단한 지체 장애인이 된 댄 중위는 시종일관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말을 하면서 자신을 살려준 포레스트를 원망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후 서로 헤어진 포레스트와 댄은 한참 뒤 다시 만나게 되지만, 댄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댄의 모습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폐인', 알코올 중독자였다. 멀끔한 예전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채, 댄은 포레스트를 비웃으며 동시에 자신의 삶을 극도로 증오하는 모습을 보인다. 댄이 이처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게 된 주원인은 참전 용사들이 가난해지도록 내버려 둔 미국도, 댄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아닌, 자신의 장애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댄의 태도처럼 느껴진다. 댄처럼 '불행에 치닫는 장애인 캐릭터'는 가장 일반적이고 전형적으로 다루어지는 관념으로, 장애의 '부정적 스테레오 타입'이라 부를 수 있다. '장애인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성공적인 생활을 할 수 없으며, 자신의 장애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우울하고 불행할 것'이라는 인식이 바로 댄이 가진 스테레오 타입이다.
'장애'를 '개인의 불행'으로 여기는 이러한 태도는 사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장애를 '죄가 가시화된 것' 혹은 일종의 '벌'로 받아들이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또 권위적으로 오랫동안 장애를 '개인의 불행'으로 해석해왔음을 보여준다. '장애인은 모두 불행하다'는 이러한 생각은 댄 중위와 같은 스테레오 타입을 통해 쉽게 강화되고, 이는 대부분의 장애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타난다. 최근 방영했던 드라마 <라이프>(2018) 역시 극 중 지체장애를 가진 캐릭터 '예선우(이규형)'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 장애인의 스테레오 타입을 강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드라마에서 예선우는 장애를 과거에 있었던 일의 '벌'이라고 생각하면서 시종일관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였고, 주변 사람들 역시 예선우를 '돌보아야 할 어린아이' 혹은 '동정이 필요한 존재'로 여기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러한 재현 방식은 장애인이 겪는 고통을 드러내는 데는 별 효과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장애인을 '타자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예선우나 댄을 바라볼 때 생기는 '동정'의 감정이 바로 이 '타자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내가 모르는 삶을 '알고 있다'라고 착각하고 대상화하는 순간 '이해'는 폭력이 되고 장애인 개개인의 주체적 삶은 삭제된다. 그리고 댄과 같은 장애의 부정적인 스테레오 타입은 '폭력적 이해'에 대한 고민을 무력하게 만들어버린다.
물론 댄 테일러가 영화 내내 술을 퍼먹거나 우울하게 생을 마감하지는 않는다. 댄 역시 포레스트와 마찬가지로 일련의 '행운'들을 통해 '극복'을 이룬다. 그는 포레스트와 함께 새우잡이 배를 타고 장사를 시작하는데, 엄청난 허리케인 속에서 그들의 배만 살아남는 행운으로 부와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 아이폰을 만든 애플사에 투자한 주식이 대박이 나는 행운이 겹치면서, 댄은 가난한 상황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댄은 휠체어에서 벗어나 '의족'으로 걸으면서 약혼녀를 포레스트에게 소개하는데, 이를 통해 관객은 댄이 '완전한 극복'에 이르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댄의 이러한 '극복'은 장애를 다룬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간 승리'의 이미지를 가진다. 이때 댄이 '의족'을 사용하는 것은 큰 상징성을 지닌다. 댄은 휠체어를 탄 모습이 아닌 '다리'를 다시 얻게 됨으로써 일종의 '정상성'(비장애인의 모습)을 회복한 것이다. 이처럼 댄의 '극복'은 곧 '정상성의 틀'로 재편입하는 것이었으며, 그가 약혼녀(이 약혼녀가 동양인이라는 점도 상당히 의미심장하다)를 소개하는 행위 역시 '이성애 남성'으로 온전히 회복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포레스트 검프>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극복의 방식은 '장애를 극복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만약 댄이 여전히 휠체어를 타고 결혼을 하지 않은 모습이었다면 그것은 '극복'이 아닌 걸까? 장애인이 비장애인이 되는 것이 정말 '극복'일까? 댄이 다시 돌아가고자 했던 '정상성'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언가를 '정상'으로 혹은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누구이며, 그 틀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어떻게 '비정상'이 되어가는 것일까? '장애인은 비장애인이 되고 싶어 한다'는 생각도, '비장애인이 되는 것'이 장애인에게 극복을 의미한다는 생각도 모두 비장애중심적 사고의 결과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장애를 극복한다'는 말은 어떻게 다르게 해석되고 실현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두 번의 글에 거쳐 <포레스트 검프>에 등장하는 장애의 스테레오 타입에 대해 알아보았다. 포레스트와 댄을 재현하는 방식에 있어 부족한 부분이 존재하긴 했지만, 본 글의 목적이 <포레스트 검프>를 폄하하거나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가려져 온 장애인의 '목소리'가 드러나 있다는 점, 장애인이 건강한 성생활을 하거나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러낸 점은 충분히 긍정적으로 해석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장애를 다룬 영화가 <포레스트 검프>와 같은 기존의 스테레오 타입을 반복해왔기 때문에, 우리는 '더 나은 재현'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전 글에서 말했듯 우리에게는 '더 나은 이야기를 할 권리'가 있고, 더 나은 이야기가 많이 만들어지고 많이 읽혀질수록 이야기가 담고 있는 실제의 삶과 사회도 나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의 글 속에 들어있는 여러 질문들에 답해나가면서, 포레스트와 댄의 또 다른 삶, '또 다른 사회'에 대한 상상을 함께 해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