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 여성의 특별한 삶: 영화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
'카르페디엠, 현재를 즐겨라!'
<죽은 시인의 사회> 명대사는 많은 현대인들의 인생 좌우명이 되었다. 욜로(YOLO) 현상이 보여주듯 일상에서 벗어나 '진짜 자신'을 찾아 떠나는 스토리는 만인의 욕망이 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젠간'을 되뇌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현실은 그렇게 쉽게 벗어나지는 것이 아니며, '진짜 나'보다 더 중요한 일자리, 승진, 월급, 학자금 대출과 전기고지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해치울 삶' 앞에서 '현재를 즐기라'는 말은 미루어둘 수밖에 없다.
영화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The last word, 2017)의 주인공 '앤'(아만다 사이프리드)은 이러한 '우리'와 닮아있다. 앤은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언론사에서 일하는 청년으로 죽은 사람들을 기리는 '사망 기사'를 쓰는 '사망 전담 기자'이다. 퇴근 후 듣는 인디 라디오만이 그녀의 유일한 낙이며, '에세이 작가'라는 꿈도 그저 묵혀둔 상태다. 멈출 수 없으니 그저 살아갈 뿐인 앤에게, 자신의 '사망기사'를 미리 써달라는 '해리엇'(셜리 맥클레인)이 찾아온다.
*본 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담고있습니다.
해리엇은 앤의 언론사에 가장 많은 광고비용을 댄 광고 회사의 전 대표다. 소위 '성공한 여자'인 해리엇은 남들보다 '편안한 노후'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죽음'이 가까워오자 해리엇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한 가지 질문을 한다. "나는 죽고난 뒤에도 '성공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해리엇은 '성공적인 죽음'을 위해 앤을 찾아가고, 앤과 함께 자신의 '사망 기사'를 준비해나간다.
그런데 웬걸, 해리엇의 삶이 '엉망진창'이다. 주변 이웃들은 물론 가족마저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 실제로 해리엇은 상대의 기분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늦은 밤 앤을 찾아와 '사망기사'를 위한 네 가지 조건을 들이밀기도 한다. 해리엇처럼 '괴팍한 노인 캐릭터'는 영화와 드라마에 자주 등장해왔다. 특히 한국 대중 매체에서는 '버럭 순재'와 같은 노년 남성의 '츤데레' 캐릭터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해리엇도 이러한 '츤데레 캐릭터'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녀의 '괴팍함'은 조금 다르게 해석된다. '일하는 여성'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녀의 '괴팍함'과 관련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저 '노년의 삶'이 아닌, '노년 여성의 삶'이 되면서 해리엇의 이야기는 조금 더 특별해진다.
해리엇은 주변 이웃과 가족들에게 악명이 높다. 그녀의 전 남편은 해리엇을 '모든 걸 통제하려는 여자'라고 말한다. 해리엇의 깐깐하고 냉소적인 성격은 한 가지 특별한 원인을 가지는데, 바로 '일하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다. 해리엇은 자신의 사망 기사를 잘 쓰기 위한 요소를 만들고자 작은 복지원을 찾아가 흑인 여성 아이들에게 이렇게 연설한다.
"내가 살던 시대는 공부하는 여자들과 결혼하지 않았어. 일하는 여자들하고도 결혼하지 않았고, 여자를 상사로 두려고도 하지 않았지. (...) 나는 그 위험을 무릅썼어."
'일하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존재하던 시대에, 해리엇의 '괴팍함'은 살아남기 위한 무기였을 테다. 수많은 남성들 사이에서 '여자니까 저러지'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는 더 냉정해지고 더 완벽해질 수밖에 없다. 강박적인 완벽주의, 그리고 괴팍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냉철한 성격은 '커리어 우먼' 캐릭터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 2006)의 '미란다'(메릴 스트립), 영화 <인턴>(The intern, 2015)의 '줄스 오스틴'(앤 해서웨이)과 같은 '커리어 우먼 캐릭터'들이 지나치게 성실하고 빈틈없이 완벽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해리엇이 '일하는 여성'으로 살아온 사실은 그녀의 삶에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이웃들의 악평에서 볼 수 있듯 그 의미는 그다지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는데, 해리엇과 그녀의 딸과의 관계가 이를 잘 보여준다. 해리엇은 이혼 후 딸을 홀로 키웠지만 연락이 끊긴지는 오래되었다. 이에 앤은 사망 기사를 잘 쓰기 위해 해리엇이 딸과 화해하는 자리를 만든다. 오랜만에 만난 딸은 해리엇의 강박적인 완벽주의를 고스란히 닮아있다. 매주 목요일 12시 35분마다 같은 곳에서 점심을 먹는 딸은, 해리엇에게 '엄마를 정말 싫어했는데 엄마를 꼭 닮게 되었다'면서 자신이 '강박성 인격장애' 판정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러한 딸의 모습은 해리엇이 '일하는 여성'이자 '엄마'로 살아오는 일이 그다지 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아도 냉철하고 완벽해야했던 해리엇의 성격, 사업을 이어나가는 동시에 육아를 해야했던 상황이 딸과 해리엇의 불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일하는 여성'으로 살아온 경험은 해리엇의 '죽음'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그녀는 '과로로 인한 심부전' 판정을 받게 된다. 해리엇의 딸이 '강박성 인격장애' 판정을 받은 것처럼, '커리어 우먼'으로 성공하기 위해 해야했던 노력들이 '질병'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해리엇의 삶은 우리의 '몸'과 '사회'의 관계성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을 남긴다. 만약 해리엇이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사회에서 살았다면, 그녀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런 사회에서도 해리엇은 괴팍한 완벽주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을까? 딸과의 사이는 어떻게 달라질까? '과로로 인한 심부전 판정'은 여전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가 가진 '몸', 그 몸이 맺는 관계와 삶이 어떤 사회에 속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해리엇의 괴팍한 성격, 딸과의 불화, 심부전 판정은 해리엇에게만 책임이 있는 걸까?
결과적으로 해리엇은 이웃들과 가족에게 좋은 평판을 얻지 못했고, 회사에서는 부당한 해고로 쫓겨났으며, 나이가 들어서는 '심부전'이라는 질병을 얻었다. 그렇다면 해리엇의 삶은 실패한 것일까? 해리엇은 '늙고 병들어버린 노인네', 혹은 '불평등한 사회의 피해자'에 불과한 걸까?
분명히 답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해리엇이 살아온 시대는 부당함이 있었고, 때로 해리엇을 크게 무너뜨렸다. 하지만 해리엇은 단 한 번도 자신과 맞서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 자신의 잠재력을 믿고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이었다. 물론 실수할 때도 실패할 때도 많았다. 주변 사람들과 가족들의 악평은 해리엇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오랜만에 만난 딸은 해리엇에게 정신과 치료를 권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내 삶이 실패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앞에서 해리엇은 고민 끝에 당당하게 외쳤다.
"이게 나야! (i am who i am!)"
해리엇이 이렇게 외칠 수 있었던 힘은, 끝없이 스스로에게 맞서고 기꺼이 실패하며 굳건한 자신을 만들어왔기에 가능했다. 해리엇은 누가 뭐라고 말하든 자기 삶의 의미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앤과 브래든이 함께했다. 사망기사를 쓰는 동안 해리엇과 함께 앤의 삶은 크게 변화한다. 늘 자신을 믿지 못하고 실수를 두려워하는 앤에게 해리엇은 말한다. "네가 실수를 만드는 게 아니라 실수가 널 만드는 거야. 앞으로 크게 자빠져. 어마어마하게 실패해." 처음에는 해리엇을 '괴팍하고 제멋대로인 사람'으로 생각했던 앤은 서서히 해리엇의 진심들을 깨닫고,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용기를 얻었다. 복지원에서 만난 '브래든'(앤쥴 리 딕슨)에게도 해리엇은 진실된 지원자가 되어주었다. 해리엇은 당당하고 유쾌한 브래든이 자신을 계속 믿고 나아가도록 격려하며, '아이'가 아닌 '동등한 사람'으로 대우했다. 이렇듯 해리엇이 건넨 조언들이 앤과 브랜드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었던 것은, 해리엇이 사회를 탓하며 주저앉아 있지 않고 끝없이 스스로를 고민하며 앞으로 나아간 삶을 살아왔기에 가능했다. 해리엇의 장례식에서 억지로 만든 사망 기사보다 진심이 담긴 한 마디 한 마디를 남기는 앤의 모습은 해리엇의 죽음이 결코 '삶의 실패'나, '무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잘' 살아왔고 '잘' 나이가 들어온 해리엇은, 마침내 죽음 앞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잘' 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혜로운 노인이 젊은 사람에게 의미를 남기고 떠나는 스토리'는 어쩌면 뻔하다. 결국은 앞서 말한 '현재를 즐겨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답이 무엇인지를 찾는 일이 아니라, 그 의미를 살아내는 우리 삶의 과정 그 자체일 것이다. '좋은 하루가 아닌 의미있는 하루를 보내라'는 해리엇의 말처럼, 잘 나이가 든다는 것, 잘 살아간다는 것, 잘 죽는다는 것은 그렇게 연결된다. 우리가 어떻게 나이가 들고 어떻게 죽을지는, 우리가 살아내는 하루하루의 의미 속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의미를 찾는 당신의 하루하루가 해리엇처럼 빛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