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잃어버린 아이의 시린 성장통-영화 <톰보이>
'이름'은 우리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유명한 시의 구절처럼, 이름은 단순한 한 명찰을 넘어선 의미를 지닌다. 이름을 알기 시작한 순간부터 우리는 저 멀리 있는 서로를 부를 수 있고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할 수 있고 눈 속에 담긴 수많은 감정들을 헤아릴 수 있다. 지영, 민지, 지윤, 유진, 지원 같은 흔한 이름이라고 해도 그 이름이 가리키는 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적어도 한 사람의 세계 안에서 이름은 중대한 지식이자 행성과도 같은 존재감을 지닌다. 개인의 삶과 역사, '정체성'을 포함하기 때문에 이름은 정적인 명사가 아닌 역동적인 동사라고 할 수 있다.
이름이 이토록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자기 이름을 스스로 규정하고 태어난 사람은 없을 테다. 대부분은 부모님이나 작명가를 비롯한 타인에 의해 정해진 이름을 따르며 살아간다. 물론 그것을 받아들이든지 혹은 거부하든지 간에 이름에 무엇을 담아갈지는 개개인의 몫이다. 즉 이름은 우리의 삶과 마찬가지로 존재를 먼저 시작하고 그 의미는 존재 이후에 부여된다. 그러니 모든 이름들은 (있어 보이게 말해보자면) 텅 빈 실존의 상태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결정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떤 이름은 그 자체로 존재에 한계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우리가 우리의 이름을 자유로이 부르지 못하고 이름이 우리를 가두어버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톰보이>(2011, Tomboy)의 주인공 '로레'는 파란색을 좋아하고 축구를 잘하는 여자아이다. 로레는 이사 온 첫날 이웃집 아이 '리사'를 만나고, 리사는 로레에게 묻는다.
Tu es nouveau? (새로 왔어?)
리사는 짧은 머리를 하고 파란 옷을 입은 로레에게 남성형 명사(nouveau)를 사용했고, 로레는 이름이 뭐냐는 쉬운 질문에도 사실대로 답하지 못한다. '남성스러운' 자신의 모습과 '여성스러운' 자신의 이름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으니까. 로레는 그 충돌을 해소하기 위해 '미카엘'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새로 명명하고 그 이름 안에서 자신을 새로 구성하기 시작한다. 로레와 미카엘이라는 이름 안에 전제된 여성과 남성이라는 젠더(gender)는 계속해서 로레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누구인지, 너의 이름은 무엇인지.
로레는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기 위해 미카엘로 살고자 하지만, 그 과정은 명찰을 바꿔 끼우는 일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그 지난한 고민 과정을 비추듯 영화는 반복해서 로레를 '거울' 앞에 세운다. 로레는 미카엘이 된 후부터 거울 속 자신의 벗은 몸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여기저기 만져본다. 남자애들처럼 침을 바닥에 뱉어보기도 하고 찰흙으로 성기를 만들어 속옷에 넣어보기도 한다. 그 일련의 모습들은 짓궂은 장난도 잠깐의 반항도 아닌, 거울 속 저 아이는 대체 누구인지 밝혀내려는 로레의 치열한 문답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밤 중 옷장 안에서 들려오는 불명의 소리를 확인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가 거울 속 자신과 맞닥뜨리던 장면처럼, 로레는 불안과 공포를 무릅쓰고 몸안에서 불분명하게 파동을 일으키는 질문들과 마주해나간다.
하지만 로레가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은 평화롭지 않다. 로레의 거짓말이 들통난 뒤 엄마는 로레에게 파란 원피스를 입혀 친구들에게 비밀을 털어놓도록 강제한다. 아이들은 로레가 '여성'임을 증명받기 위해 억지로 성기를 확인하고 리사는 시린 눈빛으로 로레를 외면한다. "널 상처 주려는 것도, 가르치려는 것도 아니야." 엄마는 그렇게 말했지만 로레는 스스로를 처형하듯 파란 원피스를 나무에 걸어놓고 미카엘이라는 이름을 버린다.
영화의 결말에서 리사는 로레에게 다시 이름을 묻고, 로레는 빨간 옷을 입은 채 '로레'라고 답하고 웃어 보인다. 마지막 로레의 웃음은 끝내 이름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조일 수도 있고 이름에 갇히지 않고도 나 자신으로 존재하겠다는 다짐일 수도 있다. 그래서 로레가 대체 '뭐'인지에 대한 관객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로레가 '여성스러움'이라는 규범에서 벗어나고자 한 여성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로레가 '성별위화감'*을 경험한 트랜스젠더 남성(FTM)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로레의 이야기를 자신의 서사로 읽을 수 있도록 시대상을 확정하지 않으려 했다는 감독의 말처럼, 로레를 단 하나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할뿐더러 영화 속 폭력을 반복하는 데 지나지 않다.
*자신과 타인이 인식하는 성별이 다른 데 따른 불편함, 자신의 몸에 대한 혐오감을 성별위화감(젠더 디스포리아)라고 한다.
내가 궁금한 것은 로레가 무엇인지가 아닌, 로레의 '다음'이다. 고난한 질문 과정을 거친 로레가 부서진 내면과 끝없는 자기 발견, 복잡한 선택지들 속에서 어떻게 끈질기게 스스로를 만들어갈 것인지, 우리는 어떻게 로레의 '다음'을 상상할 수 있는지, 로레와 같이 치열하고 아픈 성장을 해나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영화는 로레가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명명하는지와 동시에 로레가 누구에게 어떻게 명명되는지를 보여준다. 동네 아이들은 미카엘로, 엄마와 아빠는 로레로 그를 부르고, 그 이름에 따라 로레가 되어야 할 사람은 바뀐다. 하지만 유일하게 로레를 두 이름 모두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로레의 사랑스러운 동생 '잔'이다. 잔은 언니가 로레이든 미카엘이든 신경 쓰지 않는다. 잔은 언니가 원하는 대로 그를 대하며 로레는 로레도 될 수 있고 미카엘도 될 수 있다. 얼굴의 경계선을 넘어 다채롭게 점이 찍힌 잔의 그림처럼, 잔 앞에서 로레는 자유롭다.
잔의 존재는 '이름'의 의미를 새로 생각하게 한다. 이름은 내가 나를 부르는 '명명'과 타인이 나를 부르는 '호명'을 모두 포함한다. 그리고 내가 명명한 바로 그 이름으로 타인이 나를 호명할 때, 비로소 이름은 명찰을 넘어선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로레들에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 너인지 설명하라고 강요하는 것도, 그게 왜 너인지 증명하라고 부추기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가 정한 이름으로 그를 불러주는 것. 그리고 나 또한 내 이름을 다시 명명해보는 것.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주는 일. 그게 아닐까.
영화 포스터 속정면을 골똘히 응시하는 로레의 푸른 눈동자는 어리지만 솔직하고 올곧다. 그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다음’으로 나아갔을 로레에게 말해본다. 이제 너의 이름은 무엇이 되었냐고. 그 이름이 무엇이든 기꺼이 부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