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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a Sep 28. 2021

글쓰기의 쓸모

긴 여름의 터널을 지나왔다.


언젠가의 여름은 눈부시고 환하고 푸르른 날의 다른 이름이었고,

언젠가의 여름은 차가운 바다에 몸을 던치기와 웃음의 기억이었다.

빛나는 태양이 오래오래 떠서 어둠을 무서워하는 나를 지켜주었다.

5시면 환해지고 8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붉어지는 하늘이 좋았다.


그랬었는데,

지난 여름은 달랐다.


몸은 더위를 견디지 못해, 안 좋을 줄 알면서도 얼음과 찬물을 들이켜게 만들었고, 에어컨 바람이 아니면 잠들 수 없었다.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걷다보면 숨이 막혔다.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게 천천히 몸이 무너져 가니, 마음도 같이 무너졌다. 추위에 약한 내가, 겨울에 태어난 내가 사랑하던 여름이, 어느샌가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우울이라는 병이 찾아왔고,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었다. 올해 초, 시작했던 모든 스몰해빗과 루틴들이 무너졌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무기력에 빠져들었다.

삶과 죽음이라는 오래 품어온 철학적 질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왜?라는 질문에 도무지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먹여야 했다. 안그래도 입이 짧은 아이들에게 이런 무기력한 엄마의 모습을 보일 수는 었다. 혹시라도 우리 때문에, 라는 죄책감이 들게 할 수는 없었다.


어린 시절, 엄마는 오빠와 나에게 자주 '너희 때문에...' 라는 말을 했었다. 남편 없이 아이 둘을 키우며, 병까지 얻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해를 하면서도 아직도 내 안에 깊이 박힌 '나만 아니었으면 엄마는 행복했을텐데' 라는 죄책감은 여전히 나를 괴롭힌다.


 고통을 알기에, 안방에선 힘없이 누워 있다가도, 문을 열고 나와 주방에 서면 억지로라도 웃었다.


"아침은 뭐 먹을래?

점심은 뭐 먹고 싶어?

간식으로 과일 먹을까?"





9월이 되면서 아침저녁 찬기운이 슬며시 머리맡 창틀에 자리를 잡았다. 뜨거운 열기와 축축한 습기로 가득찼던 머리가 이제서야 차갑게 식어간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음에도, 그래도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며 버텨왔다.


돌아보니 그 와중에도 한줄이라도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는 내가 있었다. 비록 일기장엔 절망과 괴로움이 가득했지만, 그렇게라도 내 속의 어둠을 끄집어내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글을 쓰며 위로를 받고, 글을 쓰며 상처를 치유했다는 많은 이들의 글을 읽었었다.

나도 그들 중 하나가 되고 싶어, 쓰기를 멈추지 못했다. 물론 누구에게나 오픈된 장소에 글을 쓰는 일이 내게는 여전히 어색하고 머뭇거리게 되는 일이다. 깊은 친구, 오래 알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남 앞에 나서길 좋아하지 않는 나에겐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꽤 오랫동안 매일 A4 한장이 넘는 말들을 풀어냈지만, 별로 달라진 것을 깨닫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으니, 자연히 글쓰기에서 또 한참 멀어졌었다.

컴퓨터 화면 가득 채워진 글을 보며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그냥 타고난대로 살면되지', 포기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쓰다보면 나아지겠지, 아픔이 치유되겠지, 라는 기대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다.

지난 여름의 무기력 속에서도 단 한 줄이라도 내 마음을 적어 나간 것이 나에겐 작은 희망이었고, 나를 다시 책상에 앉게 해준 따뜻한 위로였다.


우울하면 우울하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로 할 수 없다면, 적어도 쓸 수 있는 용기가 내겐 필요했다.


 

물론, 알고 있다.

쓰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걸 쓰고 읽는 나 자신은 알고 있다.


'내가 힘들어 하는구나, 내가 외로워하는 구나, 내가 아프구나,

세상 누구도 아닌,

,

내가 이렇게 말하는 데, 좀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닐까...'


그걸 아는 것만으로도 일단 글쓰기는 쓸모를 다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보다 더 큰 쓰임은 그 다음에 생각하면 된다.

우선은 나 자신부터, 내 글을 알아줘야 한다.





9월이면 늘 듣는 노래가 있다.

미국 밴드 '그린데이'의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9월이 지나면 나를 깨워주세요)라는 곡이다.

어린시절 아버지를 잃은 멤버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9월이 지나가면 자신을 깨워달라고 노래하는 곡이다.


Summer has come and passed

여름은 또다시 지나가고

The innocent can never last

순수함도 영원히 지속될 수 없겠죠.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 9월이 지나면 나를 깨워주세요.


이제 9월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9월이 끝나기 전에 슬픔에서 벗어나고 있다.


여름은 또다시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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