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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a Dec 13. 2021

나도 블러 하고 싶어서


얼마전 까지 내가 글을 쓰던 주 도구는 삼성 노트북(가장 기본 사양만 갖춘)이었다. 4년 전 구매한 흰색 노트북이다. 흰색 가전을 싫어하는 내가 그 노트북을 고른 이유는 남편이 쓰는 맥북과 같은 색이어서였다(나, 맥북 갖고 싶었던 건가?).


가전에는 그닥 관심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 남편이 고르는 제품을 쓰는 편이다. 휴대폰이든 노트북이든 잘 모른다.

노트북을 살 때도 남편이 필요한 기능이 뭐냐고 물었고, 나는 한글과 인터넷만 되면 된다고 했다. 동영상도 거의 보지 않고(그러고보니 그 흔한 유투브도 잘 안 보네. 나 좀 뒤떨어진 사람인가), 게임이나 그림을 그리지도 않으니 고사양일 필요가 없었다. 아직까지 다이어리도 가계부도 직접 손으로 쓴다.

그렇게 남편이 골라준 가장 기본적이고 저렴한 노트북을 나름 잘 쓰며 살았다. 정말이지 글을 올리거나 인터넷만 하면 되니까.


그렇게 눈처럼 하얗던 노트북에 슬슬 아이들이 스티커를 붙이기 시작하더니, 누리끼리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물론 기능엔 아무 문제가 없어서, 그닥 불만은 없었다.






 한해, 다양한  수업을 들었다. 안방  책상에 앉아 줌을 하는데, 배경이  그랬다. 줌에서 제공하는 배경화면을 활용하려해도 제대로 화면이 나오지 않고 영상이 깨지거나 얼굴이 좀비처럼 조각나기 일쑤였다. 그냥 방의 조명을 끄고 최대한 가리며 수업을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수업을 듣는 다른 사람들의 화면에 주변 기능을 뿌옇게 처리하는 블러기능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지저분한 거실에 앉아 있어도, 블러로 처리하니 사생활 보호가 되는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내 줌 프로그램에는 그런 기능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남편에게 도움을 청했다. 알아보니, 내 노트북은 그 기능을 제공하지 않는단다. 카메라 해상도가 너무 낮다나.


, 나도 블러 하고 싶은데. 나도 주변을 가리고 싶은데.’


기회는 찬스인걸까. 남편이 내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민하고 있었다고 한다(정말?). 애플빠인 남편이 이 기회에 아이패드를 사면 어떻겠냐고 물어온다. 남편과 아이들은 사양은 좋지만 저가 브랜드의 패드를 사용 중이라 선뜻 내키지 않았다.


“아이패드? 내가 뭐하러 그 비싼 걸 왜?”

“제일 기본으로 핫딜 뜨면 많이 안 비싸. 내가 알아볼게.”

“알았어. 그럼 당신이 알아서 해. 아무튼 난 블러 기능이 필요하니까.”

“그럼 동네 애플샵에 한번 가 보자. 당신 다이어리 매일 쓰니까 이 기회에 펜도 한 번 써보고.”


그렇게 며칠 전 근처 애플샵에 들러 직접 패드를 써 봤다. 가장 저렴한 모델부터 가장 최신 모델까지 써 봤는데, 펜으로 쓰는 필기감이 가격에 따라 점점 실제 같았다. 좋은 걸 직접 보니, 마음이 자꾸 조급해졌다. 왠지 이걸 사면 펜으로 일기도 매일 쓸 것 같고, 가계부도 편할 것 같고, 게다가 동영상 편집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한 용기가 생긴다.

나도 이 기회에 유튜버가 돼 볼까?


애플샵에서 나오며 남편이 말했다.

“이왕 살 거, 한번에 좋은 걸로 삽시다. 아이패드 프로로 알아볼게.”

“응? 그건 너무 비싼 거 같은데… 좋아. 당신도 쓰면 되지 뭐.”


그후 나의 가격비교 신공이 시작됐고, 이런저런 혜택을 모두 합쳐, 남편이 예상한 핫딜과 비슷한 가격에 구매하기 버튼을 눌렀다. 알고는 있었지만, 패드보다 정품 액세서리 가격이 사악했다. 키보드도 펜도,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구매했다. 다음 달 1,  생일 선물까지  치기로 했다.


그래, 나도 이 기회에 좋은 패드 써보는 거지 .’




그제, 아이패드가 도착했다. 다크그레이 색상이라 오래 써도 낡은 티는 안 날 것 같다. 아이들은 펜 기능이 신기해서 낙서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나중에 크면 더 좋은 걸로 사줄게, 제발 여기에 스티커는 붙이면 안돼, 애들을 구슬리고, 펜으로 쓱쓱 글을 써 본다. 어색하다.


‘역시, 난 아날로그 인간인가. 아니야, 하루만에 적응하기는 힘들겠지. 내가 무슨 MZ 세대도 아니고.’


그런데, 가만히 패드를 보고 있으니 잘 써야겠다는(패드 활용과 글 쓰기 두 가지를 포함하는 의미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어서 블러 기능도 해봐야 겠지만, 이상하게 뭔가 쓰고 싶어진다. 내년 목표인 유투버와 작가에 한 발 가까워진 기분이다.

아직은 터치가 어색하지만 지금 이 글도 아이패드로 쓰고 있다.

잘 쓰려면 공부를 해야 하니까. 뭐든 아는 만큼 쓸 수 있는 거니까.



그나저나, 남편, 선물 고마워.

근데 카드 값은?

 모르는 보너스라도 생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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