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온전히 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lla Sep 15. 2020

가을 준비

마음에 곰팡이가 피기 전에


며칠 전부터 아침저녁 찬 기운이 느껴진다. 아침에 일어나 목이 칼칼한 느낌이 들면 여름 내, 열어 둔 창을 닫을 때가 된 것이다. 유난히 목이 약해, 계절이 바뀌면 언제나 목부터 민감하게 반응한다. 예전엔 내 몸 소중한 줄 모르고 목이 아프면 아픈 대로 또 감기인가, 하며 지나쳤었다. 하지만 요즘 같은 때 기침이라도 잘 못 하면 따가운 눈총을 피할 수 없을 테니, 철저히 몸 관리를 해야 한다.


우선 일어나 따뜻한 커피나 차를 마시고, 물도 미지근하게 수시로 마신다. 긴팔과 긴바지를 찾아 입고, 목에는 얇은 손수건을 두른다. 그래도 나아지지 않으면 따뜻한 목 찜질팩을 하거나 뜨거운 장판을 켜고 침대 속으로 파고든다. 저녁엔 고추를 잔뜩 넣은 얼큰하고 뜨거운 국물 요리로 몸을 데운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면 웬만한 증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진다.



바람의 온도가 떨어지면 본격적인 가을 맞이를 한다. 오늘은 여름 내 집안 곳곳에 나와 있던 선풍기들을 정리하는 날이다. 각방과 거실에 놓여 있던 선풍기들을 베란다로 옮긴다. 선풍기가 나간 자리를 차지하던 다른 짐들을 꺼내야 해서 대청소 비슷하게 상황이 흘러간다. 통풍이 잘 되지 않는 뒷베란다에 쌓아둔 짐에선 곰팡이마저 발견된다.

지난 4월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하고 짐들을 쌓아 뒀으니 고작 네 달 만에 곰팡이가 핀 것이다. 유난히 길었던 장마 탓인지 제대로 환기를 하지 못한 공간에서 곰팡이만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어려서 지하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곳은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반지하 보다도 못한 완벽한 지하 1층 집이었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위층은 낮은 아파트(내지는 연립?)이었고 지하엔 긴 복도를 사이에 두고 집들이 몇 채 있었던 것 같다. 밖에서 놀다 1층에서 계단을 내려와 지하에 도착하면 어린 마음에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하에 살아본 사람만이 맡을 수 있는 지하의 냄새가 다. 쾌쾌하고 눅눅하고 무언가 썩어가는 듯한 냄새. 아마도 지상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가난한 인간들의 숨과 썩어가는 곰팡이가 만들어내는 지독한 냄새였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요즘도 지하주차장 냄새조차 참지를 못한다. 차가운 시멘트 감촉과 해를 볼 수 없었던 기억이 자동으로 무의식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지금 사는 집은 4년 차 아파트다. 겉으로 보면 깔끔하고 깨끗하다. 해도 잘 들고 환기도 잘 되는 편이다. 이사하고 이제 고작 봄과 여름을 보냈으니 다가올 가을과 겨울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새 건물이어도 해가 부족하거나 환기를 잘해주지 않으면 결국 곰팡이가 다. 잊은 줄 알았던 어린 시절 냄새를 몸이 먼저 기억해낸 듯 금세 기분이 쳐진다.


요즘 내가 그렇다. 꽉 막힌 지하방에 사는 것 같다. 언제부턴가 한쪽으로만 생각하게 되고, 한쪽 면만 보면서 결론을 내린다. 그러니 내 마음에도 곰팡이가 핀 건 아닌지 싶다. 가끔씩 창도 열어주고 밝은 햇빛 아래에서 맑은 공기도 맡아야 새로운 생각도 하게 되고 몸도 건강해질 텐데 말이다. 누군가는 코로나가 무서우니 집에만 머물라고 하지만, 반년 넘게 고여만 가는 마음은 자꾸 아프기 마련이다. 사람이 많지 않은 곳으로 캠핑을 가거나 하다 못해 집 앞에라도 나가 신선한 공기를 맡지 않으면 어린 시절처럼 고약한 냄새를 맡게 다.


나는 9월의 하늘이 너무 좋다. 푸르다 못해 시린 하늘을 보면 걱정들이 모두 사라지는 기분이다. 요즘 같은 때, 어쩌면 잊기 쉬운 아주 사소한 행동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이다. 물론 길에 서서 하늘을 보다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오면 멈칫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마스크를 써도 눈치가 보이고, 어디든 꼭꼭 숨어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도 들지만, 그러는 사이 마음에 피어난 곰팡이는 어떻게 없애야 하는지, 답을 찾기 어렵다.





어쩌면 이번 가을에 두려운 건 목감기가 아닌 내 마음에 자라고 있는 검은곰팡이 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믿지 못하고,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며, 다른 이를 탓하는 검은 마음.


그리고 이 가을에 내가 진심으로 준비해야 할 건, 베란다에 정리해야 할 여름이 아닌

마음을 환히 밝혀줄 한낮의 짧은 외출이 아닐까 싶다. 물론 마스크와 침묵은 필수겠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영동고속도로, 비, 그런데 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