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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만을 위해 뛰는 심장

by 사이 Feb 05. 2025

가족 식사를 챙기고 청소를 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의 절반이 순식간에 사라져 있다. 의식적으로 무언가 하겠다고 마음을 먹지 않으면 모래알을 쥔 것 마냥 어느새 내 손안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냥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다 하루가 다 지나가 버린다. 청소의 기본값을 매겨 그것만 해도 정신줄을 놓으면 고구마 줄기 마냥 집안일은 알알이 또 다른 집안일을 낳아버린다. 그렇게 보낸 어느 맥 빠진 늦은 오후 딸아이가 지금 당장 자전거를 배우고 싶다고 조른다.  



자전거 배우는 딸,
그 옆에 서있는 조력자 나

어렸을 때 두 발자전거를 가르치려고 해도 좀처럼 타지 않으려던 아이가 친구들의 두 발 자전거를 타는 모습에 본인도 타야겠다며 강한 의지를 보인다. 이때다 싶어 자전거 연습을 도왔다. 아이는 자기 의지대로 되지 않는 자전거를 타며 화도 냈다가 순간 균형을 잡고 내달렸다 싶으면 박수를 치며 기뻐한다. 비록 몇 바퀴 가지 않아도 해냈다고 얼굴 한가득 성취감에 취해 있다. 하겠다는 다부진 결심, 매번 균형을 잃고 멈춰 서지만 강한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아이가 한 뺨 한 뺨 커나가고 그걸 옆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지켜보는 건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다. 11살 딸아이는 그렇게 자전거를 배우고 있다. 44살 나는 그런 딸아이를 지키는 조력자다.



아이 크는 모습에 행복하지만
나도 크고 싶다. 손톱만큼이라도 

자전거 연습을 하는 아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내 나이 11살에 나는 무엇을 했을까? 나도 뭔가를 하려고 저렇게 열심히였을까? 순간순간 행복하지만 오늘 나는 모래알 같은 하루를 보낸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하다. 행복감은 느끼지만 성장하는 ‘내’가 없는 하루. 경제개발 5개년 마냥 수치화된 목표를 세워 계획하고 실행해야 하는 삶은 아니지만, 꼭 앞으로 나아가고 성장해야 하는 삶은 아니어도 되지만 변화 없는 삶은 탄성을 잃은 오래된 팬티 고무줄 같다. 힘없고 낡은 기분을 떨쳐 버리기 쉽지 않다. 



나의 11살 첫 10km 마라톤

11살 딸아이처럼 하고 싶은 게 많았을 11살 나를 회생해 본다. 앨범에 꽂힌 사진 한 장. 그날은 운동회고 단체 무용을 하고 있는데 나는 운동화 없이 흰 양말만 신고 얼굴이 벌게 져 있다. 흰 양말 앞은 빨갛게 물들어 있다. 기억이 난다. 운동회의 하이라이트 마라톤. 어른들과 함께 뛰는 10km 마라톤에 고학년 학생들이 함께 뛰었다. 키가 제법 컸던 나도 함께 뛰었다. 기억이 난다. 뛰다 걷다 뛰다 걷다. 반환점을 돌아오는 길에 딱 맞는 운동화는 뛰는 동안 양말과 마찰을 일으켜 내 발가락에 상처를 냈다. 당시 제법 쓰라렸을 것 같은데 운동화를 벗고 맨발로 완주했던 기억이 난다. 함께 뛰던 아저씨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목소리는 기억이 난다. "제법 잘 뛰네!" 그랬지. 초등학교 5학년에 마라톤이라는 걸 했지! 빨리 뛰는 단거리보다 중도에 포기만 하지 않으면 결승선을 끊을 수 있었던 마라톤. 운동신경이 없어도 근성으로 달리면 되는 마라톤. 그걸 어린 시절에 했더랬지. 기억이 난다. 나의 11살.



44살 다시 뛰어본다.
오늘의 나를 위해 쿵쾅되는 내 심장

그래 달려보자. 44살인 오늘 달려보자. 딸아이의 자전거 연습을 마치고 운동화를 신었다. 그리고 공원 둘레길을 달리기 시작한다. 11살 그때처럼 긴 시간 달려본다. 공원을 한 바퀴 도니 땀이 난다. 두 바퀴를 도니 숨이 가빠진다. 세 바퀴를 도니 심장이 힘차게 뛰는 소리가 들린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꽤나 크다. 달리는 게 힘들어 오늘 느꼈던 모래알 같았던 상념들이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땀 흘리며 발을 구르는 내가 있고 빨리 뛰는 내 심장 소리만이 존재한다. 심장이 온전히 달리는 나를 위해 뛴다. 이 순간 누군가의 조력자가 아닌 온전히 나로 존재한다. 승전보를 알리는 북소리 같다. 승패를 가르는 전쟁 같은 하루는 아니지만 건승한 하루를 보낸 나에게 보내는 북소리다. 단지 달렸을 뿐이데 말이다.



분명 정오를 넘어서 딸아이 자전거 연습할 때까지만 해도 김 빠진 콜라 마냥 밍밍한 하루였다. 그런데 땀 흘리며 달리고 나니 탄산이 리필된 것 같다. 인생 마음먹기 달렸다는데 달리고 나니 마음도 달렸다. ‘사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데카르트는 말했지만 오늘 난 ‘달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인 하루였다. 또 하나의 기분반전 치트키가 생겼다.



#달리기 #러닝 #생활_체육 #일상_운동 #육아_달리기

#아이들이_크는_만큼은_아니더라도_나도_손톱만큼이라도_크고 싶다

#달린다_고로_나는_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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