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하고 음식과 새 마음 담기
가족여행을 앞두고 내가 하는 일은 냉장고 비우는 일. 선행돼야 할 것이 신선식품 배송 줄이기다. 식품 배달앱에서 정기적으로 할인 쿠폰을 받아 소비하는데 여행을 앞두고 야채 보단 냉동식품 위주로 주문해 보관되는 채소와 야채를 줄인다. 몇 번의 냉장고 재난을 겪고 나서 생긴 노하우 아닌 노하우다.
집을 비운 후 맞이 하는 야채 진물 쓰나미
아무 생각 없이 담았다간 여행 다녀와서 처참하게 뭉그러진 잔해들을 목격하기 일쑤다. 유통기한 지난 우유는 물론이고 한 번은 랩핑 된 애호박이 냉장고 안에서 썩어 그 진물이 온 사방에 퍼졌다. 애호박만 버리는 게 아니라 그것이 몸담고 있던 김치냉장고 서랍 한 통을 전부 청소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청소하는 과정에서 같이 보관한 찹쌀을 쏟는 바람에 쌀알을 한 알 한 알 줍고 쓸고 닦는데만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끝도 없는 집안일에 최선을 대해 애쓰는 편이 아니지만 느낌이 오면, 한마디로 필 받으면 주체하지 못하고 새끼 치듯 일을 만든다. 아니 만든다고 하기보단 이미 있던 것들이 이제야 눈에 보여 안 하던 일을 벌이기 시작한다. 진물이 스며들었던 김치냉장고 서랍장을 여러 번 제균 티슈와 마른 티슈로 쓸고 닦고 면봉까지 동원해 사이사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앉아있던 먼지들을 후비 판다. 마무리는 깨끗한, 보송보송한 마른 키친타월을 바닥에 깔고 생존해 있는 식자재를 다시금 정렬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냉동고 속 검은 봉다리의 실체가 두렵다
김치냉장고 서랍에서 시작된 일은 일반 냉장고로 이어진다. 특히 냉동고가 난이도가 높다. 뭐가 뭔지도 모를 봉지봉지 싸여있는 미확인 물체들은 하나하나 까는 게 두렵다. 도대체 무엇이 들어앉아 있을까. 두려운 마음에 개봉하면 먹다 남은 음식들을 아깝다고 하나하나 싸서 고이 모셔놓은 것들이다. 아.... 왜 그랬을까. 그냥 버릴걸. 적당히 요리하고, 적당히 시켜서 먹을 걸, 꼭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 아까워 이렇게 숨바꼭질하듯 숨길 필요 없었는데 정리를 하다 보면 이내 내 삶에 대한 태도까지 반성하게 된다.
꽁꽁 싸맨 욕망 덩어리들은
이제 그만 쓰레기통에 버리자
일에 대한 욕망,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고 저렇게 하면 더 잘 될 것 같아 일을 벌이다 조직 내에서 수용되지 못하고 또는 일정 내에 소화하느라 헉헉 되며 일해 왔던 내가 생각난다. 욕망은 많은데 그 열정(이라고 치자)을 다하지 못해 검은 봉지에 하나하나 싸서 내 마음속 냉동실에 숨겨둔, 감춰져 있던 내 마음 같다. 왜 그랬을까. 뭐 그리 대단한 일 한다고. 어차피 월급 받고 그만큼만 일하면 됐던 건데 나에 대해, 일에 대해 욕심을 부리다 보니, 다 수용되지 못하는 현실 앞에 검은 봉지 음식쓰레기 마냥 덩그러니 남아있는 것 같다. 해묵은 감정이다. 왜 이걸 품고 살았을까. 그냥 음식 쓰레기인데. 왜 일에 갈망했을까. 어차피 조직생활인데. 버리자. 이건 엄마가 해준 거라 아깝고 이건 해동하면 맛있다고 미련 남기지 말고 싹-다 버리자. 어차피 그간 정체 모르고 지나온 음식덩어리 인걸. 어차피 끝낸 조직생활인걸. 지난 감정 헤집고 되새김질해 봐야 달갑지 않은 감정만 남는다. 모두 버리고 신선한 음식과 새 감정을 담자.
추석 명절을 끼고 2주간의 가족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언제나처럼 냉장고 청소를 했다. 단지 냉장고 청소를 했을 뿐인데 의식의 흐름대로 흐르다 보니 정체 모를 검정 봉다리를 보고 옛 회사에서 느꼈던 숨겨진 감정들과 마주했다. 퇴사한 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한 시간만큼 불쑥 내 일상에 찾아온다. 그래, 긴 시간을 함께 했으니깐, 그리고 그것 또한 '나'니깐. 근데 이젠 그만 버리고 음식도 마음도 새로운 걸 맞이하자. 이 세상엔 차고 넘치게 맛있는 음식들과 즐거운 일들로 가득하다. 냉장고 안에 박제된 음식 말고, 회사에서 불편했던 옛 감정 말고 신선하고 다채로운 것들을 맞이하자. 그리고 내가 담을 수 있는 그릇 크기만큼만 소화하자. 체하지 말고. 이번 여행지 베트남에선 어떤 맛있는 이야기들이 있을지 기대된다. 그 순간을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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