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탕에서 벌거벗고 생각하게 된 그놈의 훌륭한 사람
변함없이 설레는 마음으로 목욕탕에 왔다. 겨울은 특히나 더 기분이 좋다. 머리는 차고 몸은 뜨겁다. 온도차가 큰 만큼 내 기쁨도 크다. 특히 노천탕에 앉아 있노라면 흥이 절로 난다. 오늘도 나는 노천탕을 시작으로 내 목욕여정을 시작한다. 한참 흥에 겨워 탕 안에서 혼자 노닥거리며 앉아있는데 조그마한 딸아이를 데리고 아줌마가 들어온다. 탕이 그리 크지 않아 옆에서 딸아이와 하는 대화가 나와하는 대화처럼 들린다.
“우리 딸, 이제 4학년 올라가는데 작년처럼 엄마 말 잘 들을 거지?” 아이는 당연히 “응!” 한다. 엄마가 흐뭇하다. “우리 딸, 플루트도 잘하고, 피아노도 잘하고, 태권도도 잘하고, 수영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고, 수학도 잘할 거지?!” 아이 답변을 듣기 전에 내가 다 넉다운이 된다. 그리고 연이어 들리는 말. “엄마 말 잘 들어서 훌륭한 사람 될 거지?!” 그녀는 내게 결정타를 날렸다. 난 KO패 당했다. 노천탕 옆에 놓아둔 흰 수건을 나부끼며 패배를 인정하고 순순히 물러나왔다. 그 모녀가 있던 노천탕을 벗어나 실내로 들어왔다.
훌륭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훌륭하십니까?!
어른인 나도 플루트, 피아노, 태권도, 수영, 영어, 수학을 하려면 힘든데 10살도 안된 아이가 그 일정을 다 소화시킬 수 있나 의문이고 그걸 잘하면 엄마 말 잘 듣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훌륭한 사람인가?! 나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지만 숨이 막혀 온다. 이것저것 다 떼고 ‘엄마 말 잘 들으면 훌륭한 사람’이 내 뇌리에 꽂혔다. 반문하고 싶었다. 엄마는 본인 스스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훌륭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교육을 군말 없이 잘 따라오면 훌륭한 사람입니까? 어머니?! 그리고 나에게도 반문해 본다. 나도 무지불식 간에 저런 말을 아이들에게 하진 않았나?! 이렇게 발작 증상이 나는데 내가 설마 그런 말을 했을까?! 아닐 거야. 난 아닐 거야 하지만 각성하자. 그러지 말길. 내 아이를 가스라이팅 하지 말자.
어른이 되면 취미 하나쯤 있겠지
떼를 밀며, 정확히 말하면 세신사 이모님께 내 몸을 맡기고 천장을 바라보며 곱씹어 본다. 플루트, 피아노, 태권도, 수영, 영어, 수학. 순서가 예체능이 먼저네. 아직 아이가 어려서 그런가?! 고학년이 되면 그 순서가 바뀌는 거겠지?! 그래도 아직 예체능이 먼저라 다행이다. 아이가 커서 취미는 다채롭겠군! 내 아이는 아니지만 오지랖 넓게도 남의 집 아이 앞날을 생각한다. 나도 참 주제넘지. 세신사 이모가 내 다리를 뚝뚝 친다. 몸을 뒤집으며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려본다. 그래, 나도 초등학교 때 배웠던 피아노를 잊지 않고 얼마 전 다시 배웠지. 악보 읽는 걸 다 까먹었지만 내 손가락은 피아노를 기억하고 있었어. 저 친구도 플루트가 됐든 피아노가 됐든 몸이 기억하겠지. 어른이 되어서도 잊지 않겠지. 그래, 그럼 됐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른이 되어서 "엄마, 피아노 배우게 해 줘서 고마워" 하고 엄마를 추억할 거야. 엄마와의 추억도 기억하고 저 많은 것들 중 취미 하나쯤 있겠지 싶다.
엄마가 말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있어도 좋겠고 아니어도 어린 시절 몸으로 익힌 예체능 중 뭐 하나 취미로 갖겠지. 긴 인생에 자신을 즐겁게 하는 취미 하나 있으면 그 역시 훌륭한 삶 아닐까?! 이래나 저래나 좋네. 에잇! 또다시 오지랖 넓게 남일 생각한다. 집에 가서 내 새끼나 잘 챙겨야지. 오늘도 헐벗고 혼자 있으니 상념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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