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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 "아들아! 내가 잘 못 했다"

5초도 안 걸리는 그놈의 팔씨름이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by 사이

밤새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창 밖으로 내다보는 새하얀 풍경은 맑고 깨끗하다. 푸른 솔잎에 앉아있는 모습이 어찌나 고결한지 발길을 멈추게 한다. 한참 고개를 들어 바라보다 이내 내 발아래를 내려다보니 가장 밑바닥에 놓인 눈은 물기를 머금고 지저분하게 녹아 질척거린다. 같은 눈인데 놓인 위치에 따라 어느 한쪽은 고결하고 어느 한쪽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아이들을 대하는 마음이 상냥하나 상냥하지 않은 내 속마음과 같다. 저 너저분한 내 속 마음이 보일까 질끈 눈을 감는다. 천주교 신자였다면 성당 가서 고해성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엄마, 나랑 팔씨름해요!”

“싫어, 하고 싶지 않아, 엄마는 책 읽을 거야”

“고작 5초도 안 되는데 팔씨름을 왜 안 해주세요!”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단 1초라도 내 시간을 꺼내주고 싶지 않았다. 옹졸하게 왜 그랬을까?! 아들 녀석이 직전에 내가 글을 쓰는 내 PC에서 1시간 동안 게임을 하곤 내가 3번이나 하라고 한 양치를 안 하고 해맑게 와선 본인이 또다시 하고 싶은 걸 나에게 요구해서일까?! 아니면 10시 30분이라는 늦은 시간까지 안 자고 내 앞에서 정신 사납게 왔다 갔다 해서일까?! 아니면 내 귀한 시간인 책 읽는 시간을 방해해서일까?! 아니면 본인의 의사는 꼭 관철시키려는 끈질긴 요구 때문일까?! 정말 아이의 청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고 진심으로 단전에서 전해오는 화가 눌러지지 않아 폭발했다.


“내가 왜 네가 하자는 걸 다 해야 하니?!”

“네가 요구하면 난 다 해줘야 하는 거니?!”

“내가 글 쓰는 PC에서 게임하지 마!”


아이유의 3단 고음이 부럽지 않을 만큼 꽉!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것도 내 얼굴에 하얀 마스크팩을 붙인 상황에서 말이다. 누가 보면 참 코미디가 따로 없는데 난 무척이나 화가 나있었고 아들은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단지 팔씨름을 하자고 한 것뿐인데 엄마가 격하게 반응을 하니 아이도 몸 둘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역지사지로 내가 소리를 지르는 그 순간 아이가 억울할 것 같았지만 나는 그 화를 멈추지 못하고 폭주했다. 아들 얼굴이 서럽다.


“할 말 있니?!”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나서 되물었다.

“엄마랑 팔씨름하고 싶어요” 아들 눈에선 눈물이 흐른다.


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동심. 우리 아들은 아직 어린아이의 마음인걸 내가 지혜롭지 못했다. 단지 팔씨름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화살 같은 엄마의 말들이 아이를 찔렀구나. 이런 상황에서도 다시금 팔씨름하고 싶다는 아들 녀석을 보니 할 말이 더 이상 없다. “그래, 네 말대로 5초도 안 걸리는 팔씨름 하자” 화는 화대로 내고 결국 팔씨름을 했다. 그런데 참 우습게도 내가 진심으로 팔씨름에 임하면 내가 지는 것 같아 온 힘을 빼고 팔을 꺾어 졌다. 아들아, 정말 내가 졌다.


이번 겨울이 지나면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아들. 아직까지도 잠자리에 들 때면 애착인형을 끼고 자는 영락없는 어린 아이다. 자는 모습에서 갓난아이의 얼굴이 보인다. 그런 아들이 최근 몸통이 제법 커졌다. 키는 말할 것도 없고 가슴통이 커지고 허벅지가 굵어진다는 걸 하루가 다르게 느낀다. 몸이 크면서 머리도 커지는지 이전과 다른 반응을 보이고 때론 화를 버럭 낼 때가 있다. 그간 없던 일이라 당혹스럽지만 ‘요것 봐라! 재미있네!’ 하고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어느 소아과 의사 선생님 말씀이 사춘기에 접어들면 전두엽이 가지치기를 하는데 본인은 얼마나 힘들겠냐고. 그런데 간밤에 보니 전두엽 가지치기 하는 아들 옆에 호르몬이 미친 듯 널뛰는 내 존재가 더 컸다. '나, 갱년기 인가?!' 싶다.


아이가 크는 만큼 부모도 성장한다는데 간밤의 내 3단 고음은 성장통이라고 하기에 너무 치졸했다. 저 밑바닥 한쪽 구석에 고이 싸둔 내 것, 내 시간과 내 공간에 대한 뜨거운 욕망과 갈망이 화산처럼 폭발해 버렸다. 나 자신이 너무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부끄럽게도 아주 사소한 아이의 청에 쉽사리 방아쇠를 당겼다. 어른으로서 지혜롭지 못한 밤이었다.


그냥 방학이어서, 서로 거리 두기가 안 되는 방학이어서 그런 걸로 치자.

미안, 아들.



#일상 #육아 #초등학교 #아들_팔씨름 #아들과_놀기

#5초도_안_걸리는_그깟_팔씨름이_뭐라고_그냥_웃으며_해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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