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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영 하는 할머니

제 꿈은 접영 하는 할머니 입니다!

by 사이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쏴라!’가 아니라 ‘나비처럼 날아서 돌고래처럼 유영하라!’ 알리가 말한 복싱이 아닌 물을 가르며 수면 위로 양팔을 벌리고 나비처럼 날아오르는 수영 영법 중 하나인 접영. 버터플라이를 말한다. 나는 버터플라이를 잘하는 할머니를 꿈꾼다. 초등학생에게만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 게 아니다. 40 넘은 아줌마에게도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원대하지도 않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꼭 이루고 싶은 나의 장래희망은 자유형, 배영, 평형도 아니고 꼭 ‘접영’이어야만 하는 ‘접영 잘하는 할머니’다.



제 장래희망은 '접영 잘하는 할머니'입니다.


순순하게 수영장을 정기적으로 다닌다. 이 목표를 3번 시도한 끝에 성공했다. 그것도 육아휴직 후 복직을 앞두고 더는 물러날 수 없는 시점에 수영장 이란 델 갔다. 타이트한 수영복도 익숙하지 않은데 작은 실리콘 수영모도 모양새가 골무 같아 수영장에 있는 내 모습이 영 낯부끄러웠던 시절이다. 이름하여 음파시절이다. 수영장 물에 얼굴을 담그고 호흡연습만 하던 ‘음-파!’ 시절. 음파만 하다 끝날 것 같았던 그때, 잔잔한 나비를 봤다. 1층 유리창으로 햇살이 한가득 들어와 유독 눈이 부신 날이었다. 난 숨만 쉬는 것도 어려운데 나이 드신 할머니가 버터플라이를 아주 우아하게 큰 물 튀김도 없이 하는 모습에 그만 반해 버렸다. '와~ 건장한 남성이 하는 힘찬 버터플라이만 봤는데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도 부드러운 몸짓으로 버터플라이를 할 수 있구나! 어쩜 저렇게 힘도 드리지 않고 잔잔히 잘하실까?!' 오래전 기억인데 그날 유난히 햇살이 가뜩해서 인지 할머니의 모습은 예쁜 나비였다. 그날 이후 내 꿈은 ‘접영 잘하는 할머니’가 되었다.



일상의 고민이 더딘 접영이라니!


안타깝게도 2년 넘게 수영을 배우고 있지만 이 영법은 영 모르겠다. "박자를 잘 맞춰야 한다. 양팔을 열 때 가슴을 밀어야 한다. 웨이브를 잘 타야 한다. 발차기를 할 때 배꼽을 등에 붙이듯이 배에 힘을 단단히 주면서 힘차게 발차기를 해야 한다. 양 발끝, 엄지발가락 끝을 붙이고 꾸우욱- 눌러주어야 한다. 입수할 때 발끝을 볼 수 있게 큰 반동으로 들어가야 한다." 등 그간 선생님들의 무수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몸치 인 나는 좀처럼 감을 못 잡고 있다. 힘으로 두 팔을 크게 휘저으면 될 것 같은데 앞으로 나아가질 않고 늘 제자리에서 팔과 다리만 허우적거릴 뿐이다. 물과 내가 하나가 되어 웨이브를 타야 하는데 제자리에서 팔만 휘젓는 물레방아 꼴이라니. 동영상에 찍힌 내 모습을 보니 ‘어쩜 저리도 못할까’ 싶어 부끄럽기도 하고 안쓰럽기까지 하다. 욕심이 나는데 시간이 지나도, 연습을 해도 실력이 늘지 않아 답답했다. 그런데 어느 날 '더딘 접영에 대한 안타까움과 안쓰러움, 답답함'이 내 인생에서, 내 일상에서 무척이나 가볍고 단순한 감정임을 깨닫는다. 데드라인이 있어 지금 바로 처리해야 할 일도 아니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타협하고 협상할 것도 아니다. 미묘한 감정싸움도 아니고 눈치 작전도 없다. 그냥 정직하게 하면 된다. 1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 스스로 물 잡기를 하고 힘차게 발을 구르면 되는 훈련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되겠지. 하는 편안한 마음으로 '나'를 기다려 주면 되는 ‘꿈’으로 가는 여정이다. 접영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단순하고 단편적이라 안도한다. 그리고 깊은 행복감을 느낀다.


접영을 못 하는 게 요즘 내 고민이라니! 참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구나! 평온한 오늘 하루를 온전히 누릴 수 있음에, 별 탈 없이 지내는 일상에 새삼 감사하다. 마흔을 넘기고 회사 밖이지만 되고 싶은 것이 있고 매일 하고 있으며 하루하루 즐길 수 있음에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내년에는 할머니는 안 되어도 접영은 잘하고 있겠지. 그럼 다음에 뭐가 될까? 그랜마 모지스처럼 ‘그림 그리는 할머니’를 꿈꿔볼까?! 오늘도 나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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