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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Nov 06. 2024

외할머니의 마지막 밥상

―변상벽의 <모계영자도>

외할머니는 아흔일곱 해를 사셨다. 2년 전 고향 산청에 내려가는 길은 장맛비가 내렸다. 지리산 고개를 빗길에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조심 넘어 집 몇 채가 모여 있는 석남리에 도착했다. 호박과 고추, 들깨가 아무렇게 자라고 있는 남새밭을 지나 시골집에 들어서니 외할머니가 안방에서 모로 누워 주무시고 계셨다. 망백을 훌쩍 넘긴 외할머니의 하얗게 샌 머리와 굽은 허리를 보니, 가슴이 저릿했다. 외할머니는 그 연세에도 본인 한 몸 스스로 건사하고자 하셨다. 


걸레를 찾아들고 방바닥을 훔치는데 밥상 다리가 눈에 걸렸다. 낡은 보를 들추니 다 식은 밥과 국, 김치와 장아찌가 차려져 있었다. 수저가 세 쌍인 걸 보니, 우리 식구 오면 먹이려고 노구를 움직여 차려놓으신 거였다. 그것이 외할머니가 나를 위해 차려주신 마지막 밥상이었다.     


암탉의 모성애

괴암(怪岩) 뒤쪽 하얀색 찔레꽃이 피었다. 벌과 나비가 농밀한 꿀샘으로 먹이를 찾아 날아들고 있다. 보송한 솜털을 가진 햇병아리들도 암탉의 부리로 모여들고 있다. 새끼들에게 먹일 벌레를 부리에 문 암탉의 표정이 다정하고 당당하다. 부지런한 암탉에게 막 잡혔는지 벌레는 살아서 버둥거리는 듯하다. 새끼에게 제때 먹이는 일이야말로 어미의 가장 중요한 임무일 터. 암탉의 윤기가 흐르는 깃털과 풍만한 몸집에서 힘과 위엄이 느껴진다. 어미의 먹이를 먼저 낚아채려는 새끼들의 부산스러운 경쟁은 없다. 어떤 녀석들은 이미 먹이를 받아먹고 물 한 모금으로 입가심을 하고 있다. 어미 꽁무니에 뒤처져있는 녀석들도 동작이 여유롭다. 그동안 어미가 새끼들을 두루 잘 보살펴왔음을 알 수 있다. 향긋한 찔레꽃 꽃잎 하나 암탉의 얼굴 아래로 떨어진다. 어미 닭에게 봄날이다.


 <모계영자도>는 자손들 먹이는 일에 진심이었던 우리 외할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어린 시절 방학이 되어 외가에 가면, 외할머니는 마당에 풀어 놓고 키우던 닭을 잡아 삼계탕을 끓여주셨다. 자식들 모두 출가시킨 뒤에는 뒷마당에 벌통을 놓고 벌을 기르셨는데, 그 귀한 지리산 토종꿀을 결혼 후에도 떨어지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아토피로 고생하는 증손녀를 위해 보내주신 산초기름, 김장철이 되면 얻어오는 고춧가루, 설날이면 차례상에 올리는 곶감…. 2년 전 시골집에서 마지막 뵈었을 때는 찹쌀 몇 되를 한사코 싸주셨다. 


닭이 모성애가 강한 동물이라는 것은 <모계영자도>를 접하면서 알게 되었다. 암탉은 알을 품는 20여 일 동안 추위와 더위에도 굴하지 않고 알을 지킨다고 한다. 그 기간 동안에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으며 알을 품는단다. 새와 동물을 그리는 영모화(翎毛畵)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변상벽은 수탉을 주로 그리는 당시 화가들과는 달리 암탉을 주인공으로 많이 그렸다. 말을 더듬고, 부끄러움이 많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자신을 평생 뒷바라지하며 살았을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암탉 그림에 담고자 했다.     



외할머니의 묘비명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몇 달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장례식장이 있는 부산의료원까지 내려가는데 일곱 시간이 넘게 걸렸다. 진눈깨비와 겨울비가 섞여 내렸다. 상복을 입은 남동생을 따라 빈소로 들어섰다. 빈소 앞 전광판에는 고인의 이름과 상주명이 적혀 있었다. 그날 외할머니의 이름을 처음 보았다. ‘외할머니’라는 말은 나에게는 고유명사였다. 할머니는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적이 없었다. 자식들에게는 어머니로, 손주들에게는 할머니로 외할머니로 사셨다. 상주명에는 내 이름도 있었다. 네 딸과 두 아들, 사위와 며느리들, 열세 명의 손주들의 이름. <모계영자도>의 그림 속 병아리들처럼 고인의 이름 아래 자손들이 다정히 모여 있었다. 추적추적 적시던 울컥함이 조금 밀려갔다. 


우리들은 외할머니가 살뜰히 챙기신 음식을 먹으며 자랐다. 암탉이 벌레를 잡아 병아리를 먹이듯 외할머니는 밭에서, 산에서, 들에서 먹거리를 찾아와 우리를 먹이셨다. 그 순간들이 외할머니의 봄날이었을 것이다. 외할머니의 묘비명을 남긴다면, 글 대신 <모계영자도>를 새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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