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 그림 감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화집에서 명화를 보고, 유명한 전시회도 간혹 갔지만, 가슴 저릿한 감동을 맛보는 심미적 체험을 한 적은 없었다. 취향에 맞는 이미지는 있었지만, 그 이미지가 내 가치관을 흔들거나 위로나 흥분을 선사하지는 않았다. 서사가 없는 그림의 이미지는 찰나의 만남으로 끝났다. 낯선 여행지의 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난 그림에 발길을 옮길 수 없었다는 그 흔한 경험담조차 나에게는 없다. 오래전 기억을 헤집어봐도 그것과는 거리가 먼 장면들만 떠오른다.
장면 하나.
이십 대 때,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화집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인간은 고깃덩어리일 뿐이라는 선언과도 같은 그의 그림이 왠지 해방감을 주었다. 치기 어린 시절에는 이단자에게 끌리는 법. 그 기억조차 스쳐지나간 인연처럼 가물거릴 뿐이다.
장면 둘.
직장 생활할 때,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를 몇 번 보러 갔다. 친구 회사가 주최하는 것이라 공짜 표가 매번 생겼다. 모네, 고흐, 고갱을 보러 온 수많은 관람객에 떠밀려 그림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전시회는 핑계였을 뿐 친구 얼굴을 보고 싶었다. 삶은 고단한데, 그림은 예쁘기만 했다.
장면 셋.
엄마가 된 후, 딸아이를 위해 전시회 티켓을 예매했다. 아이의 창의력 계발에 도움이 된다는 교육적인 전시회를 골랐다. 아이는 그림에는 별 관심 없고 야외로 놀러온 것이 마냥 즐거운 듯했다. 도떼기시장 같은 미술관을 아이를 쫓아 종종거렸다. 관람은 노동이었다.
장면 넷.
작년 추석 무렵, 장욱진의 전시회(「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에 갔다. 장욱진의 <독>에 관한 짧은 글을 쓴 직후였다. 사람들을 피해 내 보폭으로 걸으려고 애썼다. 멀리서 보고 가까이 다가가서도 보았다. 마음으로만 선모하던 사람의 얼굴을 직접 보고 온 기분이었다. 멀찌감치 서서 살짝 눈인사는 하고 왔다.
장면 다섯.
작년 늦가을, 한국 근현대 명화전「사시산색 그리고 바람」 전시회에 갔다. 제주의 화가 변시지의 그림 앞에 멈칫 섰다. '보리밭 화가' 이숙자의 <맥파> 앞에서는 흔들렸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미술관의 그림도 고요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고요하게 흔들렸다.
이제 그림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고 첫 문장을 고쳐 써야겠다. 그림에 얽힌 장면을 떠올려보니, 작년 가을부터 작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가을 내내 그림을 만나고 그림에 대해 글을 썼다. 글을 쓰기 위해 그림을 정독했고, 그림을 정독하다 보니 그림의 서사, 작가의 서사, 그리고 나의 서사가 뒤엉킨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했다. 뒤엉킨 서사에 따라 이리저리 흩어지는 단상들을 가지런히 모으는 것이 번잡스럽기도 했지만, 그렇게 글을 쓰고 나면, 그제야 그림을 ‘만난’ 것 같았다. 젊은 날에 스쳐지나간 프랜시스 베이컨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