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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Sep 28. 2024

원숭이, 낙원으로 가다. 1

- 앙리 루소의 <원숭이가 있는 열대 숲>과 김보희의 <THE DAYS>

 19세기 중반,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인간과 원숭이 사이의 유사성과 진화 과정을 밝혀냈지만,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에게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 신에 의한 인간 창조를 믿는 사람들은 인간이 ‘원숭이의 사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인류는 진화론이 등장하기 전부터 원숭이가 동물 중 인간과 가장 많이 닮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인류는 둘의 유사성에서 비롯되는 친밀감과 거부감 사이를 오가며 원숭이를 다양한 메타포로 창작물에 활용했다.


 인간과 자연의 중간, 문명과 야만의 중간, 그 어디에 있는 존재. 나 자신의 적나라한 실체를 보듯 불쾌감을 불러일으키지만, 때론 야생과 원시에 대한 욕망을 투영하게 되는 존재. 가장 의인화, 인격화하기 손쉬운 대상이 ‘원숭이’이다. 나는 20세기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의 <원숭이가 있는 열대 숲(Tropical Forest with Monkeys)>(1910)과 21세기 한국화가 김보희의 <THE DAYS>에서 그 ‘원숭이’를 만났다.   

  



원시인이 되어 열대 숲에 쉬다

 앙리 루소가 그린 <원숭이가 있는 열대 숲>에는 다섯 마리의 원숭이가 등장한다. 무대의 가운데에 적갈색 털의 오랑우탄이 바위에 걸터앉아 두 발을 얕은 물에 담그고 있다. 뜰채를 바위에 걸쳐 두었을 뿐, 물고기를 낚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만사 무심한 표정이다. 나뭇가지 위에는 머리털이 하얗게 센 원숭이 한 마리가 낚싯대를 드리운 채 엉뚱한 곳을 보고 있다. 눈여겨보면 나뭇잎 사이로 몸을 숨기고 잔뜩 신경이 곤두선 녀석이 있는데, 반대편 나뭇가지에서 매달려 놀고 있는 다른 원숭이들의 천진함에 그만 잊히고 만다. 강렬한 붉은색 야생풀 뒤로 검은 뱀이 입을 벌리고 있지만, 열대 숲의 평화가 깨질 것 같지는 않다. 끈적거리는 진녹색에서 투명한 연녹색까지 열대식물이 만드는 초록의 향연에 흰색과 노란색의 야생 꽃들이 초대 가수처럼 빛난다. 원숭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열대 숲의 수수께끼는 풀 길이 없다. 어린아이의 그림같이 소박하지만 원시적이고 신비롭다.


 멕시코에 다녀왔다고 허풍은 떨었지만, 백화점 전단지에 실린 판화를 보며 동물을 그려서일까, 원숭이의 묘사가 정교하지 않다. 오랑우탄, 긴꼬리원숭이, 개코원숭이 등 다양한 종류의 원숭이를 그렸는데, 얼굴과 표정 모두 그냥 사람 얼굴 같다. 마치 연극 무대에서 배우가 원숭이 옷을 입고 원숭이 흉내를 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앙리 루소의 열대림 그림 중 유독 이 그림의 원숭이에 작가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밥벌이를 위해 세관에서 주 70시간의 반복적이고 지루한 노동을 하며, 

휴일에만 짬을 내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한 집안의 가장. 

‘일요화가’라는 멸시를 받으면서도 스스로를 진정한 화가라고 자부했던 세관원.

사기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다녀오기도 한, 

거짓말과 과장된 말로 자신을 미화했던 허풍선이. 

두 명의 아내와 아홉 명의 자식을 자신보다 먼저 보낸 뒤 

홀아비로 살다 실연의 아픔에 독극물을 마신 남자. 

그 남자의 모습이 <원숭이가 있는 열대 숲>에 있었다.


 불행도 결함도 많은 소시민이지만, 꿈꾸기를 멈추지 않은 화가. 소박한 붓질로 거듭난 신비로운 열대 숲, 노동도 의무도 멸시도 이별도 없는 그곳에서 남자는 세관원의 옷을 벗고 자유롭고 무심한 원시인으로 휴일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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