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 하비의 <물놀이하는 소년들>
사내아이의 물장구질로 일어난 물보라가 하얗게 반짝인다. 수평선 가까이 내려온 늦은 오후의 햇살이 물결에 흩어져 황금빛으로 일렁거린다. 방파제가 파도를 막아 잔잔해진 바다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동네 사내아이들이 옹기종기 방파제에 걸터앉아 친구들의 헤엄치기 경주를 구경하고 있다. 하얗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앞서가는 친구를 응원하고 있는 것일까? 무릎을 짚고 상체를 기울여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 아이의 모습에 긴장감이 맴돈다.
하지만 방파제에 걸터앉은 아이들은 별로 흥미가 없어 보인다. 이미 지쳐 있다. 여름날의 늦은 오후다. 짧은 갈색 머리가 바람에 날리고 걸친 옷은 이미 햇빛에 말랐다. 한나절 실컷 물놀이를 하고 난 뒤 식은 몸을 데워주는 햇빛을 쬐고 있자니, 나른하고 졸립다.
감각으로 기억하는 평화
이 그림의 주인공은 물에서 노는 아이들이 아니다. 한여름 바다 위로 저무는 햇살과 헤엄 후 지친 아이들이다. 나른한 평화, 무심한 행복이다.
산골에서 태어나서 유년을 보낸 나는, 이 그림을 보며 바다가 아니라 산에서 놀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지리산 자락에 있는 조그만 마을에서 외할아버지는 산허리를 일궈 만든 밭에서 풀을 매고 계셨다. 한여름이었다. 매미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키 큰 나무가 만든 그늘이 드리워진 너럭바위 위에서 어린 남동생과 나는 한나절 놀고 있다. 꾸벅거리며 졸기도 하고 하는 일 없이 지루해하며 외할아버지 풀매기가 끝나길 기다린다. 키 큰 나무가 만든 그늘과 산 아래 시냇물을 스쳐 온 바람 덕분에 문득 서늘하기도 하다.
그날의 이미지들은 성장하는 동안 몸에 새겨져 불쑥불쑥 그리움으로 떠올랐다. 감각으로 기억하는 ‘평화’다.
하지만 그날은 이제 없다. 어린 시절의 나른한 평화, 무심한 행복은 이제 없다. 그 뼈아픈 자각을 그림 속 볼 빨간 소년의 시선이 일깨운다. 바다에 뛰어들지 않아 몸을 식히지 못했는지 소년은 유독 볼이 달구어져 있다. 맞은편 모자를 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한데, 둘 다 물놀이에는 관심이 없다. 심지어 무엇 때문이지 마음이 불편해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다른 아이들도 입 벌리고 소리 내어 웃고 있지는 않다. 그래도 그들은 만족스러워 보인다. 피부를 밝고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햇빛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볼 빨간 소년은 나의 시선을 계속 붙잡는다. 소년은 나이가 들어가는 나를 응시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나른한 평화, 무심한 행복이 이제는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시선으로 하는 말
작가는 왜 노는 아이들 무리와 외따로 떨어진 듯한 소년을 그렸을까? 소년의 시선은 왜 슬퍼 보일까?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설파하기 위해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1898)의 키딩 선생은 학생들에게 졸업생들의 학창 시절 사진을 보여준다. 사진 속 졸업생들은 그 순간 젊고 꿈 많은 십대들이었지만, 이제 모두 사자(死者)가 되었다. 어린 시절의 나른한 평화, 무심한 행복의 순간도 언젠가 사라진 시간이 될 것이다. 행복의 순간을 그리고 있지만, 먼 훗날 과거의 영광으로만 남을 것이라는 슬픈 인식을 작가는 소년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해럴드 하비(Harold Harvey)는 1874년 영국 콘월 지역의 조그만 항구 도시에서 태어났다. 영국 남서부에 위치한 콘월은 기후가 온화하여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다. 그는 2년간의 파리 유학 시절을 제외하고는 고향에서 평생을 보냈다. 고향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일상의 소박한 감성을 화폭에 담았다고 평가받고 있다. <물놀이하는 소년들(Boys bathing)>은 하비가 쉰여덟 살이 되던 해인 1932년에 그렸다. 그는 1941년 5월 19일 콘월에 있는 뉴린에서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