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말소리

낯선 나라에서 나의 민낯 마주하기

by 세일러킴

레인쿠버가 시작된 줄 알았는데, 인디언 서머다.


날씨가 좋아 가까운 공원으로 소풍을 갔다.

‘인디언 썸머’라는 한국영화가 있었다. 이미연과 박신양 배우가 등장하는 멜로드라마였다. 인디언 서머는 북미에서 가을에 일주일 정도 발생하는 따뜻한 날을 말하는데, 영화 제목인 ‘인디언 썸머’는 국선 변호사와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구형받은 여죄수의 짧은 기간의 사랑을 비유한 것이었다. 영화를 통해 알게 된 ‘인디언 서머’라는 단어가 인상 깊었는데, 밴쿠버에서 직접 겪게 되니 기분이 묘하다.

9월 초, 미국 워싱턴주와 오리건주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밴쿠버는 2주 가까이 심각한 대기오염 상태였다. 연기와 미세먼지로 가득한 뿌연 하늘을 보니 여기가 캐나다인지 황사로 뒤덮인 한반도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다.

밴쿠버의 가을과 겨울은 ‘레인쿠버’라고 부르는 우기다. 가을을 선언하는 비가 내리자 대기오염 특보는 해제되었다. 공기 질은 좋아졌지만 우중충한 하늘이 계속됐다. 지난여름 화창한 햇살을 충분히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쉽다. 으슬으슬한 공기에 두꺼운 옷을 꺼내자마자 여름으로 장면 전환됐다. 변화무쌍한 밴쿠버 날씨다.


미국 산불 영향으로 밴쿠버 하늘은 유령도시처럼 흐릿했다.

아이들은 요령껏 학교생활을 터득하고 있다. 생김새도 성격도 다른 두 딸은 적응 방법도 차이가 난다.

첫째는 고슴도치처럼 몸을 웅크린 채 주변을 탐색 중이다. 첫째에게 누군가 호의를 전하면 감사를 표현해 줄 것을 부탁했다.

둘째는 쭈뼛거리며 친구들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다. 방과 후에 픽업을 하러 가면 저 멀리 어색한 노력 중인 둘째가 보인다. 하교 길에 오늘은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보니 “친구들이 잘 놀아줘서 다행”이라고 대답하는 둘째다. 그럴 때는 어깨를 꼭 안아준다.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지켜보면 내가 투사된다. 특히 나와 비슷한 기질과 성향을 가진 첫째의 행동은 나의 심리 패턴을 알아차리는데 실마리가 됐다.

사람은 저마다 유달리 민감한 부분이 있다. 민감한 부분을 들키기 않으려는 방어 전략도 각각 다를 것이다. 본인은 효과적이라고 믿는 전략이 타인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다. 가끔 벌거벗은 임금님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흑역사’ 인지도 몰랐던 순간이 떠올라 몸서리친다.


밴쿠버에 와서 새로운 사람들과 교류를 할 때, 투머치 하게 말과 행동을 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내면의 연약한 면을 들킬까 봐 긴장하여 벌어진 부작용이다.

한국에서 살 때는 이런 특성이 별 문제가 안됐다. 오랜 시행착오를 통해 사회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할 때 어떤 가면을 써야 하는지 터득했기 때문이다. 가면을 쓰면 본심 조절이 어렵지 않다. 역할에만 충실하면 되니까.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본심을 감추지 않아도 된다. 상대방의 기분과 무관하게 멋대로 훅 들어가는 본심이다. 어떤 이는 그런 특징을 진솔하다 했고, 어떤 이는 무례하게 봤다. 소탈하게 여긴 사람은 인연이 이어졌고, 불쾌했던 사람은 떠났을 것이다. 약점까지 품어 줄 만큼 편한 사이에서는 단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한국을 떠나자마자 모든 인간관계는 리셋되었다. 새로운 만남의 과정에서 수면 아래에 숨어있던 단점들이 떠올랐다. 특히 본심을 감추지 못하는 미숙함이 창피했다. 소꿉친구에게 멋쩍다고 털어놓았다. 친구는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다가 낯선 사람에게 안 해도 될 얘기까지 하는 것을 목격하고 의아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넙죽넙죽 털어놓다가는 뒷감당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친구의 말을 듣고 기억이 떠올랐다. 남동생을 따라 병원에 간 적 있다. 담당의사가 증상을 묻자 남동생은 병과 무관한 내용을 밑도 끝도 없이 늘어놓았다. 평소에 나름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남동생의 요령 없는 모습이 생경했다. 긴장했나 보다.

남동생과 나의 성격이 닮았으니, 친구가 봤던 광경도 비슷한 맥락이었을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오며 가며 만난 사람에게 시시콜콜한 가족 사정을 여과 없이 떠드는 형국이다. 다 큰 어른의 그런 태도는 정직도, 솔직함도 아니다. 사리분별이 안 되는 거다.


밴쿠버에서 만난 이민 선배들은 고향사람처럼 반갑다. 말로만 듣던 향우회가 이런 분위기일까 싶다. 정착 과정에서 크고 작은 사건 사고를 겪었던 이민 선배들은 기꺼이 귀한 경험을 나눠 주었다. 감사한 일이다.

적정한 경계 설정은 건강한 관계 맺기의 전제다. 경계를 배우지 못한 어설픈 처신이 도움의 손길을 당혹스럽게 했다. 속셈을 숨기고 선을 긋는 것과 다르다. 본심을 자연스레 다룰 줄 알아야 서로서로 다치지 않는다.

신화학자 고혜경 교수는 EBS 강의 ‘신화학자가 들려주는 옛이야기’에서 경계설정이 되지 않은 미발달 상태의 위험을 역설한다. 난쟁이 집에 살고 있는 백설공주는 낯선 이를 함부로 들여서는 안 된다는 충고에도 불구하고 마녀를 집안에 들인다. 처음 본 사람은 문 밖에 두고 가까운 사람만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과하게 타인에게 맞추는 삶은 과 침해와 과 허용을 낳는다. 부끄럽게도 이 당연한 이치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익숙했던 공간을 떠나니 낯선 장소에서 오락가락하는 내가 보인다.


본심을 감추지 못하는 ‘투머치 토크’를 모두가 고쳐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마다 처지가 다르듯 성장 방향도 다르다. 그러니까 나에게만 한정된 과제다.

엄숙 대신 허허실실, 완벽 대신 털털 대충, 목표까지 직진 대신 딴짓, 반듯한 몸가짐 대신 흐트러진 매무새, 수치심 대신 뻔뻔함이 누군가에게는 자유 해지는 길일 수 있다.

나의 거침없는 행동과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속내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용기가 넘쳐서가 아니다.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으면서도 엉뚱하게 접근하여 삽질하는 것이다. 순리대로 흘러가기를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의 힘이 부족하여 제풀에 지치는 거다. 초조함을 이겨내려면 마음 근육을 강화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도토리를 입에 문 청설모 : 동물들은 겨울 준비가 한창이다.


이번 가을, 기울어진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며 지내야겠다.

박노해 시인의 글처럼 ‘말씀은 가만가만, 걸음은 나직나직’하게.


단풍국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가을이다.


나무잎 색깔이 변해가고 있다.



가을 말소리


- 박노해 -


가을에는 자꾸만 고개가 숙여진다

물들어가는 나뭇잎처럼

익어가는 수수와 벼 이삭처럼

가을에는 나직이 고개가 숙여진다

가을에는 해맑은 향기가 말을 한다

아침 서리에 몸 씻은 들국화처럼

햇살 바람에 붉어진 사과 알처럼

가을에는 속 깊은 향기가 말을 한다

가을에는 말없이 돌아봐진다

누군가 부르는 듯한 노을길처럼

책을 읽다 눈을 감은 그 사람처럼

가을에는 가만가만 돌아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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