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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희 Apr 04. 2023

죽음에 익숙하다는 건

사는 건 별거 없다는 이야기

주말 내내 웹사이트 수정으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계속 무언가 일을 하다가, 아침이 되고 새벽이 되고 그리고 밤이 되었다.

허리 한번 숙이기가 힘들었고, 그리고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형이 아픈 건 몇 달 전 일이었다. 형의 친구로부터 알게 된 소식.

간도암 4기. 세상에 본받고 싶은 사람이라고 하면 '형'이라고 불렀을 것 같은데,

형이 아프다니... 그리고 위치가 안 좋다. 희귀한 암이다.

나도 유방암 1기일 때 한쪽 가슴을 잘라내야 한다는 걸 알았을 때, 억울했다.

나 그렇게 나쁘게 살지 않았거든... 왜 시련은 이렇게 연거푸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오는지, 원망도 했었다.

그러다 이내, 아들의 말처럼 '1기인 게 어디야"로 수긍하게 되고, 인정하게 되고,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30년 전에 셋째 오빠가 교통사고로 먼저 갔을 때, 그걸 보고도 난 살려고만 내 생각만 이기적으로 했었다.

살겠다고 그것도 남들보다 더 잘 살겠다고 아둥 바둥한 이기적인.


살긴 살아야 한다. 우리가.

암이어도 살아야 하고, 우울증과 조울증과 공황장애여도 살긴 살아야 한다.


저녁에 잠들면서 다시 내일 눈을 뜨고 싶지 않아도 눈이 떠지면 살아야 하고, 살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고,

어디선가 먹이를 가져와서는 가족을 먹여야 하고, 자식을 생각해야 하고, 새들이나 동식물이나 나나 다를  하나 없는 삶을 이어가야 한다. 아주 강력한  그것 하나. 살아야 한다는.


대박이가 아팠다(9살 된 시베리안허스키). 다리에 난 종양 수술을 하고 20 바늘은 꿰맨 것 같았다. 다리털을 다 밀고 마취 주사를 맞고, 아이가 40k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처음 아이의 다리에서 종양을 발견하던 날도 나는 울었다. 미안했다. 수술은 해야 하는데, 내가 돈이 있나.... 수술 비용조차 걱정이 될 정도로 경제 생황은 말이 아니게 안 좋았고, 지금도 근근이 버티는 것이지 안정권이 아니다. 이혼을 하고 암환자라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할 수도 없어서 보험사에 들어가서 피주머니를 차고 교육을 받고 일을 하고 몸이 회복되는 시간까지도 난 늘.

최선을 다 했지만, 가난했다. 그래도 다행히 아이의 상처가 터지지 않을 정도에서 수술비가 준비되었고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속이 다 시원했다. 그래도 9년간이나 같이 한 삶이어서 수술 전날은 잠도 오질 않았다.


형을 안건 몇 년 안 된다. 내가 피주머니를 떼고 겨우 교육받을 시기였다. 페북을 통해서 본 형은 바른 사람이었고, 신영복 교수님의 실천하는 삶을 그대로 이어받아, 코로나가 창궐한 시절에도 모금을 하고 자신이 더 보테었을테지만, 마스크와 방한복을 의료진에게 무료료 보내드리고, 봉사활동도 하고, 형이 운영하는 회사는 또 그대로 네이버에 합병시키면서 직원들 하나하나를 다 챙겼다. 형이 회사를 판 이유도 딱 한 가지다. 같이 창업한 친구분이 암으로 돌아가시면서 그 친구 가족들에게 그 지분을 주기 위해 자신의 사업을 접었다. 별로 친하지 않은 나 같은 사람에게도 힘을 내라며,후배 분의 친필 사인이 든 책을 택배로 보내셨다.


'당신이라는 바람이 내게로 불어 왔다' 내가 그 책을 받고 얼마나 울었던지.


정말 힘든 사람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 책 한 권, 술 한자리.

사실은 그런 것이 사람을 살게 한다.

 

나는 아직도 내가 교육을 받다가 공황장애가 와서 선릉역을 걷다가 형에게 보낸 문자를 기억하고 있다.

'저 잘 모르는데 한번 뵐 수 있을까요?'라는 말. 그날 그렇게 아침에 문자를 남기고 형을 봤다.

누군가 커피 사주고, 과자 사주고, 다시 힘내서 보자고 하는 말.

지난번 책은 정말 고마웠다고 그 책이 너무나 남달랐다고, 전 그 책으로 겨우 버텼다고 하는 말.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알아가게 된다. 사람의 사연을 그를 그의 가족을.


며칠 전 엄마의 기일이라, 봉은사에 가서 초를 켰다.

엄마, 아빠, 셋째 오빠, 나, 아들.... 그리고 그.


거기에 형이 장난처럼 내것은 없냐고 물었다. 없었다. 미안하게도 나만 생각하고 내 가족만 챙기고.


오늘 봉은사를 갔다. 오로지 형만을 위해.

가기 전서부터 눈물이 쏟아지더니, 봉은사에서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눈물이 났다.

형이 아무리 서울대를 나와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번 녀석은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잘 싸워야 하는데...


살아보니 사는 거 별거 없더라.

아무리 높은 지위더라도, 건강이 안 좋으면, 어쩔 수 없고, 갑자기 사고가 나면 그 또한 삶이 다 한다.

사람은 그렇다. 아주 오래오래 살지 못하고, 나이 들면 아프고, 행복의 순간은 그 순간뿐이다.


형은 기적을 만든 사람이다.

내가 아는 한 가장 똑똑하고 강한 사람이다. 이번에도 기적을 만들 것임을 믿는다.

형이 안 만들면 누가 만들 것인가.


형 꼭 이겨내야 해. 그러면 내가 형이 좋아하는 아삭 거리는 총각김치 더 맛나게 만들어서 선물해 줄게.

울 아들 이름, 거꾸로 하면 형 아들 이름. 형은 꼭 이겨내야 해. 견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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