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 대한 기억을 모두 얼려버렸어요-
콜드브루. 찬물로 내린 커피다. 찬물에 커피가 잘 우러 나지 않기 때문에 잠적식은 8시간, 침출식은 12시간~24시간 우린다고 한다. 그가 내린 커피는 침출식이었나 보다. 며칠을 내렸다고 하고, 내 생일 즈음 그 선물을 받고 그와 헤어졌다. 그리고 집에 와서 냉장고를 열고 영원히 그 커피를 얼렸다.
사랑하는 마음 자체도 얼려지기를 바라면서.
사람에 대한 미련이나 기억이나 점차 조각이나.
잊힌다.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지고, 언제 그를 좋아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으며, 더욱이 다른 사람이 생기면 급속도로 잊힌다. 어떤 이는 가끔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아서 한참을 생각한 일도 있다.
머리가 나쁜 탓일 거다. 혹은 머리가 나빠지고 싶다.
쓸데없는 기억들은 살아가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아픈 기억이나, 나쁜 기억, 잊고 싶은 순간들은 빨리 잊는 편이다. 그런데도 요즘 사람은, 이렇게 빨리 잊어가면서, 대박이에 대한 기억은 좀처럼 잊히지 않아서
힘든 편이다.
길을 걸으면 아이와 걷던 모든 순간들이 기억 난다. 아이가 먹던 아리수 수돗물, 벤치에 앉던 자리, 강남역에서 건물 바라다보면서 쉬는 장소, 약국 갈 때마다 묶어 두었던 자리, 마트 들릴 때마다 묶어둔 주차장 옆 장소... 방금 봤는데도 엄마를 발견하면 웃던 환한 얼굴. 그 모든 거리.
모든 건 시간에 비례하지 않을까?
20년간의 결혼 생활이라고 해도, 2년 정도는 따로 떨어져살았다. 그러면 18년. 대박이와 보낸 시간은 떨어져 지낸 시간 없이 9년. 그러면 결혼생활의 반을 대박이와 함께 보낸 것과 같다. 아기 때 와서 응가도 못 가리던 녀석이 성견이 되고, 공원을 질주하고, 커피 숍에서 지인들과 만날 때도 놀고 했던 그 모든 순간이 그대로 잊히지 않는다. 그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잊힐 듯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그를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더치커피를 한 땀 한 땀 내리는 사람이었고, 그 커피맛이 너무 좋다며, 칭찬한 것이 전부였는데, 나는 왜 동굴 속으로 기여 들어갔는지 모를 일이다.
4월 1일 만우절 날. 처음 그가 내 속으로 들어 온 날.
얼린 커피는 녹여서 먹으려고 했었다. 진정한 사라짐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해서. 딱 1년이 되는 날이었으니까, 그런데 어쩐지 그날 하지 못했고, 그다음 주로는 대박이가 아팠다. 그리고 정신이 없었지. 아이 장례식을 치르고. 지금도 사실은 깨어 있고 싶지 않다.
누굴 위해 더치커피를 내려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치커피를 내리면서, 커피도 중력에 따라 내가 손을 대지 않아도 커피가 일을 하는데, 그런 사업을 하고 싶다는 사람이 있었더랬다. 비교. 맞다 비교.
그와 사업을 안 하길 잘했다고도 생각하지만, 사업은 내 손이 닿지 않으면, 금방 사그라든다. 저절로 돈이 벌리는 사업 같은 건 없다. 그건 남을 이용한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기억은 얼렸는데, 언젠가 그 기억을 녹이는 날이 올지, 혹은 그 기억을 해체하는 날이 올지, 아직은 모르겠다.
그냥 냉장고 가장 깊숙한 곳에 그날의 모습 그대로 얼려져 있다.
가끔 냉장고 문을 열면서 생각한다.
그때, 두개 달라고 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