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퇴의 맛 】- 은퇴전문가 한혜경의 지지고 볶는 은퇴 이야기 28가지
_한혜경 / 싱긋
“은퇴 그 후”
이 책을 읽다보니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실존인물이다. 오래전 일이다. 사원으로 입사해 이사까지 된 사람이다. 성격은 좀 까칠하지만 부지런한 사람이다. 이 양반이 정년퇴직을 앞두고 입버릇처럼 한 말이 있다. 나한테만 할 말이 아니었겠지만, 퇴직하면 여행이나 실컷 다닐까라고, 그동안 시간 없어서 못 먹었던 팔도의 맛집을 다 다녀보고 싶다는 말을 하길래 그러시라고 맞장구를 쳐줬다. 내심 당신이 다녀봐야 얼마나 다니겠냐 싶어서 한 소리였다. 그런데 진짜 그는 그렇게 떠났다. 아예 퇴직금 수령 통장을 따로 만들어서 통장과 카드만 들고 집을 나갔다고 했다. 그래도 식구들은 며칠 바람 쐬다 오려니 했는데, 아예 폰도 꺼놓은 상태로 2년 만에 홈리스처럼 집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 기간 동안 식구들은 기가 막혔다. 실종신고까지 할뻔 했다. 전화는 안 받아도 가끔 집으로 전화는 했더란다. 나 아직 살아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 2년이라는 시간동안 대학원 다니는 막내딸이 등록금을 못내 휴학을 하고, 아내가 무슨 수술인가를 받았는데도 돈도 안 보내주고, 집에도 안 다녀갔다. 퇴직금을 다 쓰고 거지꼴로 집으로 기어들어온 아비라는 작자에게 자식들은 등을 돌렸다. 아내도 막내딸 결혼시키고 이혼을 생각하고 있다고 들렸다. 그리곤 내가 집과 직장을 옮기면서 내 관심 밖에서도 멀어져갔다. 그 사람, 집 떠난 2년 동안 진정 행복했을까?
이 책의 저자는 은퇴 후 ‘나의 은퇴일기’라는 제목의 글로 한 저널에 연재했던 글을 수정 보완했다. 은퇴한다고 말했을 때 주위 사람들에게 많이들은 이야기가 ‘여행’이다. “이제 여행도 마음껏 다니실 수 있겠네요. 좋으시겠어요. 부러워요.” 그러나 막상 앞 기수 은퇴선배들은 “한 1년은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그러느라 정신없을 거야.” 좋다는 이야긴지, 안 좋다는 이야긴지 헷갈리는 마음이 들더란다. “지금은 말해도 소용없어. 한 1년 지나면 너도 알게 될거야.” 그런데 은퇴 직후에 연구실 정리를 모두 끝내고 교문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그날따라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아, 이제야 길고 긴 여행이 끝났구나. 이제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앞서 소개한 싸나이가 이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자리 잡았다면 2년씩이나 집을 비우지 않았을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남는다.
책엔 저자가 은퇴 후의 삶에 좌충우돌 적응해나가는 과정이 진솔하게 담겨있다. ‘공간문제로 이혼까지?’라는 대목이 그 중 흥미로웠다. 은퇴자들(특히 남성. 저자가 만난 인터뷰이들의 90%가 남성이었다고 한다.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은퇴시기까지 직장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으로 이해한다)이 마음에 깊이 담고 실천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저자가 친구들과 만나 수다타임을 갖던 중, 그 날의 수다 주제는 ‘은퇴와 공간문제’였다고 한다. 지방에 있는 연구원에 다니던 친구 A의 남편이 은퇴 직후 연구실에 있던 한 살림을 용달차에 싣고 집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문제는 4식구 살기에도 빠듯한 공간에 방 하나도 모자라 여기저기 쌓아놓은 잡동사니(친구 A의 표현)를 보며 남편을 제외한 식구들 모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저자 역시 비슷한 시기에 은퇴한 남편과 집안에서 공간(이라 쓰고 영역이라 읽는다)다툼 신경전을 벌이게 되었다고 한다. 은퇴남들이여! 아내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동물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자신의 영역을 침입한 무리외의 수사자에게 암사자가 목숨을 걸고 영역을 지키려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심하게 물리거나 쫓겨나지 않으려면 집안에서도 아내의 영역을 존중해줘야 할 것이다. 천지사방에 늘어놓고 함부로 영역표시하고 다니지 말일이다.
“부디 이 책이 은퇴 후에 또는 100세 시대에 어떤 일상을 보내야 할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공감과 위로 내지 작은 이정표가 될 수 있기를,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작은 신호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은퇴의맛
#한혜경
#싱긋
#쎄인트의책이야기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