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할머니가 소천하셨다. 하지만 슬프지는 않다. 이제는 육신의 굴레를 벗고 영원한 안식과 평안을 누리 실 테니까.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나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산다는 것은 곧,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늘 마음에 세기고 사는 말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에 ‘Memento Mori’라는 라틴어 격언이 있다. 메멘토 모리. 직역하면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고, 풀어서 설명하면 매 순간 삶이 유한하고 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후회 없이 살라는 말이다.
전도서에는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다는 말이 있다. 초상집은 죽음을 의미하고, 혼인집은 세속적 즐거움을 의미한다. 눈앞의 쾌락을 좇는 사람은 미련하지만, 다가올 죽음을 미리 생각하는 사람은 현명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내세에 관심이 많다. ‘죽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될까?’ 이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늘 흥미로운 주제였다. 사람들이 내세를 궁금해하는 까닭은 죽고 난 이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근본적으로는 알 수 없는 죽음 이후에 대하여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알 수 없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아니라, 눈앞에 닥쳐오는 분명한 죽음이다.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 죽음은 필연적이다. 허나 산자 가운데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인간은 언젠가 우리가 빈손으로 떠난다는 사실과 그때가 언제일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고, 주린 배를 채우는데 급급하다 보면 어느새 죽음은 나와 상관없는 먼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허나 그렇게 눈앞에 보이는 것들만 쫓아 살다가는 결국 허망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잔뜩 뿌려놓은 떡밥을 회수도 못하고 졸속으로 끝맺는 연재작품이 그렇듯, 죽음을 준비하지 않은 삶은 마치 허무의 수렁으로 달려가는 봇짐장수와 같다.
그렇다면 죽음을 준비한다는 건 뭘까.
나는 병상에 누워 임종을 맞이하는 할머니를 보며 생각했다.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곧, 매일 하루 살아갈 이유를 찾는 것이라고. 이것은 삶을 대하는 하나의 자세이자 태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일본의 성자 우찌무라 간조는 이를 ‘일일일생(一日一生)‘이라 불렀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게 아니다.’
세상에는 죽는 것만 못한 삶이 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는 것은 개똥처럼 굴러다니라는 말이 아니다. 살아야 언젠가는 기회가 오고 좋은 날도 온다는 뜻이다. 희망이 없다면 삶은 축복이 아니라 끝없는 고통과 형벌이다.
반면,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기억되는 삶이 있다. 기독교의 순교자들이 그렇고, 독립을 위해 자신을 던진 열사와 의사들이 그렇다. 이 모든 건 결국 인간이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사람에겐 이유가 생존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오늘 하루를 살아갈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허나 오늘 하루를 충만하게 살고, 오늘 주어진 시간 속에서 살아갈 이유를 발견했다면 그 하루는 죽음을 준비한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이 삶의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살았기 때문이다.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흘러간다. 오늘 하루를 나는 생존했나, 아니면 살아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