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엔 나를 찾지 말아요.

#18

by 나의해방일지

“당분간 명절엔 저를 찾지 마세요.”


부모님께 말했다. 이번 명절 연휴에 혼자 어디 가서 바람 쐬고 올 거니까 당분간 명절엔 나를 찾지 말라고. 이것은 부탁이 아니라 통보였기에 부모님은 조금 섭섭했겠지만 그래도 할 수 없다. 평소에 연락을 안 하고 지내는 것도 아니고, 명절이 아니어도 종종 만나고 있어서 명절 때 얼굴 좀 안 비치는 게 사실 뭐 그리 대단한 불효도 아니다.


이번 추석은 이혼 후 처음 맞이하는 명절이라 아직 친척들 얼굴 보고 하하 호호 웃을 만큼 내 멘탈이 좋지도 못할뿐더러, 이런 기회에 훌쩍 여행을 떠나서 힐링의 시간을 갖는 게 필요하기도 했다.


나는 전통이나 예절을 가볍게 여기는 무뢰한은 아니지만, 부모님이 이혼을 한 뒤로는 줄곧 명절이 오는 것이 싫었다. 이혼 가정의 일원에게 대한민국의 명절은 어쨌거나 자기의 결핍을 다시 한번 직면하고 실감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친척들 중에 부모님의 이혼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냥 아무런 말 없이 있어도, 명절 분위기 속에서는 알 수 없는 어떤 박탈감이나 소외감 따위의 감정이 들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이걸 괜한 자격지심이라고 여기겠지만, 원래 세상의 많은 것들이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는 법이다.


생각해 보면 결혼한 뒤로 나는 이놈의 명절이 더 지긋지긋해졌던 것 같다. 우리 부모님도 이혼을 했고, 장인 장모님도 이혼해서 따로 살았던 터라, 명절만 되면 네 군데를 각각 방문해서 인사를 해야 하는 아주 대환장 파티가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온 가족이 함께 우애를 다지는 명절을 꼭 지키고 싶거든 이혼을 하지 말고 참고 살던가, 그게 아니라 이혼을 하고 가정을 깼으면 명절에 자식들과 화목한 시간 보내는 걸 포기하던가 둘 중에 하나만 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기분이 나쁘게 들려도 할 수 없다. 대가족이 다 함께 모이는 명절문화는 아무리 생각해도 현대사회의 이혼가정에게 그다지 적합하지가 않다.


결혼 후 6년 정도 그 짓거리를 하다가, 어느 순간 화딱지가 나서 얘기했다.


“앞으로 명절마다 4번씩 찾아다니는 건 힘들어서 못하겠으니 추석이나 설 둘 중에 한 번만 보는 걸로 해요”

“……”


그러고 나서는 이번 추석엔 엄마, 아빠. 다음 설에는 장인, 장모. 이런 식으로 번호표를 끊고 보러 다녔다. 어휴, 이렇게 적어 놓고 보니 명절과 나의 악연이 참으로 길기는 길다. 안 그래도 썩 유쾌하지 않은 명절이었건만, 이제는 대를 이어 나까지 이혼을 해버렸으니 더더욱 명절 모임에 가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져 버렸다.


나는 일지감치 긴 추석연휴를 확인하고 비행기 티켓과 숙소를 미리 예약해 두었다. 그렇다. 나도 이제는 명절에 해외여행을 떠나는 (한 때 동경의 대상이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막상 그 입장이 되어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명절마다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들 중에는 형편이 좋고 여유가 있는 가족단위 여행객들도 있겠지만, 나처럼 집구석에 처박혀 있기는 너무나도 우울한 탓에 꼭 한국을 떠나 바람을 쐬고 와야만 하는 딱한 처지의 사람들도 있겠노라는... 그러니 명절에 해외여행 가는 사람들에게 원화유출하느니 어쩌니 하면서 너무 손가락질하진 말자.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순리대로 산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모름지기 순리(順理)를 따른다는 것은 세상의 이치나 도리에 어긋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곧, 상황에 알맞고 처지에 어울린다는 말이다.


지금 내 상황에 어울리는 처신은 무엇일까? 불편한 마음을 견디고, 속을 끓이며 친적들 얼굴을 보러 다니는 것은 지금 내 처지에 어울리지도 적절하지도 않은 일이다. 살다 보면 이렇게 물이 흐르듯 마음이 가는 대로 할 줄도 알아야 하는 순간이 있다.


종종 뉴스 같은 데서 들리는 이야기인데, 명절 전후로 이혼건수가 증급한다고 한다. 그것이 따지고 보면 다 순리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잘 지내는 가족이야 문제가 없겠지만, 평생 부모노릇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시덥잖은 인간들이 명절이랍시고 이래라저래라 하며 처자식 속을 뒤집어 놓는 이치에 맞지 않는 일. 그리고 그런 불합리함을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참고 견뎌야 하는 부자연스러움 때문에 갈등이 생긴다. 그런 일로 부부사이에 문제가 생기고, 부모자식 간에 다툴 바에는 차라리 나처럼 명절에 해외여행을 떠나는 편이 낫다. 그러면 시부모나 처가에서 상놈 소리를 들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명절 스트레스로 이혼하진 않을 것 아닌가.


나로서는 그나마 친척들과 더불어 모이지 않고 직계가족끼리만 만나면 좋을 것 같다. 그냥 엄마, 아빠, 동생 그리고 나. 이렇게만. 하지만 또 그럴 수는 없는 것이 어머니에게도 형제들이 있고, 아버지에게도 형제들이 있기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 입장에서는 명절에 형제들과 만나서 교류를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형제들의 자녀들과 손주들(나에게는 사촌들과 그 사촌 조카들)도 만나게 되는 것이고.


내가 부모님더러 명절에 나하고만 시간을 보내자고 하는 게 이기적인 생각이듯, 부모님이 나더러 형제들끼리 모이는 자리에 함께 와달라고 하는 것도 역시나 이기적인 생각이다. 그러니 피차 양보를 하는 수밖에 없다. 어머니, 아버지는 명절에 형제들과 더불어 시간을 보내고, 나는 나대로 혼자 시간을 보내면 된다. 이것이 내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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