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단편] 다름과 닮아감
사람이 살면서 사람 사귐처럼 어려운 일이 있을까?
(재고 따질지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 만난 인연은 차치하자)
하루에도 몇 명을 만나고 몇 명과 관계를 유지하는가.
점차 관계 맺음이 줄어가는 시대라고 할지라도
‘나는 자연인이다’로 외따로 홀로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관계 속에서 진정으로 함께이고 싶은 이는 또 얼마나 될까?
‘함께’라는 마음의 지지가 되는 이가 있다.
이런 사람과의 관계는 거리의 멀고 가까움, 시간의 많고 적음과 관계가 없다.
이런 이라면 나이의 많고 적음도 관계없을 것이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보통 ‘친구’라 부른다.
끌림의 시작은 유유상종이라 하여 가까워지거나,
이와 반대로 전혀 다른 매력에 이끌려 가까워지기도 한다.
‘다름’에 이끌려 가까워졌다 해도 따지고 보면 결국엔 유유상종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진짜로 다르면 결국엔 친구로 남지 못하고 찢어지기 마련이다.
비슷하다는 착각으로 붙들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듯 보여도 비슷할 리가 없다.
비슷함에 숨은 디테일을 보려 하지 않는다.
한 배에서 나고 자란 형제자매도 다를 진데 나고 자란 환경이 다른 친구야 오죽하랴.
동질감을 느껴 가까워졌다 해도 따지고 보면 비슷해 보여도 같을 리가 없다.
두루뭉술 비슷해서 좋고, 고달픈 인생살이의 동반자처럼 느껴지는 좋은 관계라야 유지되기 마련이다.
‘다름’은 의견 충돌이 생기고 피곤한 법이니까.
친구 관계에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교사는 한두 번이면 그만이지, ‘다름’을 끝까지 유지하기에 우리네 삶은 여유롭지 못하다.
이것이 대부분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나의 친구 사귐도 그렇다.
그러나 이런 내 대부분의 교우 관계로 엮을 수 없는 존재가 있다.
비슷해 보여도 나와 다름이 확실하니 말이다.
달라서 오히려 다름을 인정하고 배우고 싶다.
다름을 닮아가고 싶게 만든다.
갈등이 많아 선택이 늦은 나는 최후에 최후까지 미루다가 꾸물 행동에 나선다.
그러나 이 친구는 나의 제안에 망설임이 없다.
나라면 더 많은 시간을 들였을 것이다.
친구도 물론 망설였을 테지만, 나와는 비할 데 없이 씩씩하다.
쉽지 않은 일에 참 빨리 ‘오케이!’로 답한다.
“하면 좋지” 하면서 실제로 행동하는 이는 없다.
끝까지 행동하는 이는 이 친구뿐이었다.
그래서 나의 바람에 서슴없이 함께 해주는 결정과 실행력에 감동하곤 한다.
쓰지 않을 수많은 이유보다 쓰기 위한 한 가지에 집중하는 모습이 대단하다.
지켜야 하는 일상의 번잡스러움이 남들과 다르지 않을 텐데도 말이다.
이번 나의 제안에 망설임은 조금,
바로 함께 해주는 친구의 모습을 더 닮고 싶었다.
마음을 나누는 벗이자 스승으로 삼고 싶은 친구를 ‘사우(師友)’한다.
많은 불운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