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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지유 Oct 19. 2022

[단상단편]행복한 고민을 향한 물타기

[행복한 고민을 향한 물타기] 


‘행복한 고민’을 주제로 글쓰기를 해야 하는데, ‘행복한 고민?’ 곱씹게 된다. 

‘고민’의 수식에 ‘행복한’을 달 수 있을까? 


고민은 반갑지 않은 정체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자신 안에 들어앉은 것과의 싸움이다. 

결코 반갑지 않아서 똑바로 마주하고 싶지 않다. 


한자를 풀어보면 ‘고=쓴 맛, 민=번민’ 이러니 무단 칩임 같은 존재같지 않겠는가? 

들어앉은 마음을 들여다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어렴풋이, 그러려니…‘남들도 다 비슷하겠지.’ 달래고 자위하며 들여다볼 뿐이다. 


봉사가 코끼리 코 더듬는 심정인 게 차라리 낫다. 

마주했다 손 치더라도 고민의 정체를 제대로 알 수나 있나? 그게 맞기는 할까? 나의 지식과 지혜가 그토록 창대한가? ‘난 내 고민의 원인을 다 알지!’ 이런 오만에 휩싸일 때가 고민을 증폭시키는 지름길이다. 



서두가 길었다. 

말했듯 문을 열어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고민의 원인을 파악하기 두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이라서이기도 하다. 


요즘의 고민은 내 몸에 관해서가 대부분이다. 

10년 묵은 빤쓰같은 거라 진짜 보여주고 싶지 않은데…

(글쓰기의 속성이 그렇지. 가장 추한 곳을 기여히 후벼 파고 말지. 지금 쓰지 않으면 더 반갑지 않아 쓰지 않으려 할 게 빤하다. 쓸까 말까 고민하느니 그냥 쓰자!)  


내 몸으로 인해 발생하는 고민은 내가 어쩔 수 없는 영역이다. 

근 50년 함께한 몸이건만,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고민이다. 

고민에 고민, 질병과의 치열한 전투의 시행착오 끝에 알아낸 건, 왜 이런 몸일까의 실마리뿐이었다. 


‘앞으로 남은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나이 먹어갈수록 또 어디가 또 어떻게 아프게 될까? 한 해 한 해 나빠질 일만 있는데 계속 살아야 하나? 더 늙어서는 병원비 약값은 어떻게 충당하지?’ 

이런 고민을 아무리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인가? 

답은 빤하다. 소용없는 짓이다. 의사도 모르겠다는 병을 내가 무슨 재주로 알까. 


그러니,

‘이런 몸으로 나았어도 보기에 허우대 멀쩡해 보이고, 가고 싶은 곳 돌아다닐 수 있으니 다행이지. 자본주의 시민의 책무는 포기했더라도 아무렴, 이 정도로 버티는 게 어디인가. 아직 길바닥에 나앉지 않았잖아.’ 

이런 식의 자위를 하는 수밖에.  


입 맛 쓴 요놈과 동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로 물타기를 하는 것이다. 물타기가 쉽지 않아서, 행복한 고민?! 그런 게 있을 리 없네. 고민의 앞에 ‘행복한’을 수식하지는 못 하겠다. 


‘나만 이렇게 불행한가’ 고민되고 의문이 든다. 

‘행복한’을 수식할 날이 내게도 있을까? 

저 위에 계신다는 그 분이 어느 하나를 특별히 사랑하거나, 미워하여 몰빵하지는 않았으리라 믿는다. 

‘불행 총량의 법칙’이라는 걸 믿는다. 

불행의 평준화, 지닌 양은 모두 같은데 시기와 크기가 다를 뿐이겠지. 

내가 모르는 타인의 불행! 


제대로 고민이라도 해서 현실과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고민을 음이 같은 다른 한자로 고쳐 적어본다. 

쓴맛으로 번민하는 ‘고민(苦悶)’이 아니라, 괴로움을 위로하는 ‘고민(苦閔)’. 

한자에 담긴 의미처럼 글로 써서 내 안에 든 쓰디쓴 생각에 물타기한다. 

글이 된 고민이 물이 되어 조금씩 흐른다. 


할렐루야, 마이 미제라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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