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프 행어

9화. 절벽 끝에서

by 헬렌

한 달이 지났다.

은정이는 연락을 끊었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메일을 보내도 답이 없었다.

나는 매일 죄책감에 시달렸다.


점심은 혼자 먹었다.

아무도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다.

복도를 지나가면 수군거림이 들렸다.

"저 사람 때문에 친구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이나 하고 있네."

"집안도 별로라며? 아버지가 빚 지고 도망갔다던데."


어느 날 저녁.

관리부서 게시판에 글이 올라왔다.

익명이었다.

'김민지 과장의 민낯'

내용은 이랬다.

집안이 망해서 절박하게 일함

동료들을 무시하고 혼자만 잘남

친구를 이용해서 자기 이득을 챙김

모두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믿었다.


나는 인사팀에 찾아갔다.

"이거 명예훼손 아닌가요?"

"글쎄요. 익명이라..."

"누가 썼는지 찾아주세요."

"IP 추적이 어렵고... 또 명확한 증거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최지원이 결혼했다.

이준혁과.

나는 결혼식에 가지 않았다.


지옥 같은 날들이 지나갔다.

그러나 나는 아무 내색하지 않고 일에만 열중했다.

6개월이 지나갔다. 수군거림도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



어느 날.

은정이에게서 메일이 왔다.

한 줄.

'언니, 나 캐나다로 유학 가.'

나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받았다.

"은정아."

"...언니."

"잘 지냈어?"

"응. 언니는?"

"난 뭐 그냥 그렇지."

침묵.

"은정아, 미안해."

"언니가 왜 미안해."

"내가... 막지 못해서."

"언니 잘못 아니야."

은정이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나... 많이 생각했어. 그 일은 내 탓이 아니라는 거."

"..."

"그 사람이 나쁜 거야. 언니가 아니라."

"은정아..."

"나 이제 괜찮아. 정말이야."

"유학은 언제 가?"

"다음 달. 어학연수 먼저 하고 MBA 준비할 거야."

"잘 됐다. 새로운 시작이네."

"응. 언니도 새로 시작해, 다 잊고."

"그래."

"언니, 고마워. 그때 옆에 있어줘서."

"..."

"힘들 때 울 수 있게 해 줘서."

나도 울컥했다.

"잘 다녀와, 은정아."

"응. 언니도 잘 지내."


전화를 끊고.

나는 창밖을 봤다.

봄이 오고 있었다.

긴 겨울이 지나가고.



2년 후 나는 런던으로 연수를 가게 되었다. 2달간의 사내 MBA 코스. 20여 명의 전 세계 지점에서 모인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고, 시험도 보고 하면서 즐겁게 지냈다. 나이도, 국적도, 다양하고 일에서 놓여나 편하게 공부하는 분위기였다.


중간에 휴가를 주어서 6개국에서 온 9명이 렌터카로 3박 4일 동안 런던에서 스코트란드까지 다녀오는 여행도 했다. 여자는 3명, 포르투갈, 싱가포르, 그리고 나였다. 우리는 오래된 커다란 300년쯤 된 영국 시골집, B&B 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도 하고 저녁엔 펍에 가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고 열정적인 여행이었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모든 것을 잊고, 즐겁고 유쾌한 날들을 보냈다.


연수가 끝나고, 나는 미리 준비했던 2주간의 개인여행을 하게 되었다. 유럽에 갈 기회가 흔치 않은 시절이어서 개인휴가를 전부 사용해 유럽의 주요 도시를 여행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여러 나라, 여러 인종, 그리고 비슷한 듯 다른 풍경과 다른 문화 그리고 큰 유럽이라는 대륙이 기차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마치 한 나라처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점이 경이로웠다.


그러면서 좁은 사무실에서 일어나는 정치와 갈등, 시기와 질투가 얼마나 우리의 인생에서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일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 절벽에서 밀쳐져 떨어졌을 때, 은정이와 나는 발버둥 치면서도 어느 순간 우리가 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는 고통 속에서 온 힘을 다해, 날개를 펴서 다시 날아올랐다. 추락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날개를 가진 존재라는 것조차 알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3년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각자의 지극히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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