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프 행어

10화 에필로그

by 헬렌

1990년 들어 세계금융시장은 소용돌이치며 변하고 있었다.

IT산업의 발전으로 투자론, 경영학, 금융공학, 산업공학등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금융시장, 금융상품이 생겨나고 투자은행들이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공격적 경영을 하며 은행 간의 인수, 합병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국내에도 선진금융기법을 익힌 미국 MBA들이 고액연봉을 받으며 쏟아져 들어왔다.


그즈음, 박 부장이 갑자기 다른 은행으로 이직을 하고 미국에서 MBA를 했다는 매니저가 새로 왔다. 그 뒤를 이어 2-3명의 미국 MBA출신 직원들이 새로 조인했다. 은행 내에 위기감이 돌았다.


어느 날 지점장이 나를 불렀다. 요점만 간단하게 말했다. 본점에서 리스크 관리부서를 만들라고 하는데 적임자가 너밖에 없다. 외부에서 채용하려고도 했는데, 국내에 리스크 매니저가 있는 곳이 거의 없다. 네가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하겠다. 그러면서 20CM도 더 되어 보이는 두께의 커다란 바인더 2개를 내밀었다. 본점에서 온 매뉴얼이었다. 시한은 2달, 매뉴얼대로 리스크 측정 시스템을 셋업 하는 것.


다음 날 아침.

발령 공지가 났다.

사무실이 술렁였다.

"김민지 차장이 리스크 관리팀으로 간다는데."

"거기 지점장 직속이잖아."

"게다가 부장으로 승진까지?"


나는 짐을 쌌다.

3층에서 7층으로.

새로운 시작.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최지원이 왔다.

"축하해요, 김 차장님."

그녀의 목소리에 독이 가득했다.

"고맙습니다."

"운이 좋으시네요. 지점장한테 잘 보였나 봐요."

나는 웃었다.

"."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최지원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김 차장님, 높이 올라갈수록 떨어질 때 더 아프다는 거 명심하세요."

나는 웃었다.

문이 닫혔다.


어쩌면 그녀도 희생양일지도 몰랐다. 집안이 좋아서, 학벌이 좋아서, 부자라서 누구보다 자신이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편견과 강박감에 시달리고 있는 똑똑한 바보.





1997년 11월.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IMF.

외환위기.


"비상 회의입니다. 회의실로 모이세요."

사무실이 술렁였다.

"뭐야, 무슨 일이야?"

"IMF 때문 아닐까?"

"설마..."


회의실.

전 직원이 모였다.

본사에서 온 임원이 단상에 섰다.


“우리는 한국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독일계, 캐피털 은행이 우리은행을 본점차원에서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소수의 인원만이 남아 인수합병일을 마무리하게 될 것입니다. 합당한 보상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충격.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상세한 내용은 부서장들을 통해 공지하겠습니다."

회의가 끝났다.

사람들이 멍한 표정으로 나갔다.


자리로 돌아와 창밖을 봤다.

겨울이었다.

하지만 봄이 올 것이다.

언젠가.




나는 다시 인수합병 관련 일을 마무리하는 CFO 자리로 갔다.

3개월쯤 지나면서부터, 사람들은 차례로 떠나기 시작했고, 인수한 은행의 사람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마치 패전한 마을에 점령군이 들어오듯이. 최지원도 떠났다.


1년 후 나는 인수합병일을 마무리하고, 그곳을 떠났다. 남아달라고 제안을 해왔지만, 다른 곳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다른 은행으로 옮겨 2년쯤 지났을 때, 나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내일이면 50이었다. 새로운 인생을 찾고 싶었다. 여행을 하고 또 다른 세상을 만나고, 9-5가 아닌 자유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은퇴 후 나는 2달간의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출장 중에 스쳐지나가면서 다시 오리라 했던 곳들, 시간 때문에 못 가봤던 곳들 그리고 새로운 곳들을 여유 있게 즐기면서, 떠돌아다녔다. 돌아와서는, 근교의 한적한 아파트로 이사했고, 평화롭고 단조로운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마트에 다녀오는 길에 아무 예감도 없이 박 부장을 멀리서 보게 된 것이었다.


은정이, 은정이는 캐나다에서 결혼해서 아이들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잠시 옛날 기억에 잠겨 있던 나는 식탁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열었다.


제목: 클리프 행어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움직였다.

25년 동안

감춰졌던 진실.

나는 썼다.

밤새도록.


노트북을 덮었다.


마치 깊은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왠지 모를 따뜻하고 행복한 감정이 마음 깊은 곳에서 모락모락, 작은 불씨처럼 피어올랐다.


젊은 날에 있었던 박 부장의 비열한 흉계를 글로 써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글을 쓰는 동안 깨달았다. 어둠보다 빛이 더 많았다는 것을. 나를 밀어낸 사람들보다 그 어둠을 뚫고 믿음과 사랑과 지지로 나를 일으켜 세운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는 것을.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면,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거기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리고 그들이 나누어 준 행운으로 일어서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지금에 이른 것이었다.


나는 일어나 창가로 갔다.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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