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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도 사람이다 Jan 04. 2025

큰 조카의 오징어게임

잊지 못할 여행, 그리고 생일

모처럼만에 조카들과 함께 강원도 여행이다.

휴게소에 들르는 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설레는 장소다.

밥은 밥대로 간식은 간식대로 즐기기 딱 좋은 날이 아닐 수 없다.

큰 조카는 어포를 작은 조카는 알감자를, 안 먹는 것 빼고 못 먹는 게 없는 아들 녀석은 많고 많은 간식들을 뒤로하고 닭껍질 튀김을 사수한다.

그렇게 잔뜩 먹고 다시 출발하여 먼저 도착한 곳은  속초중앙시장이다.

큰 조카가 강원도 놀러 가면 꼭 먹고 싶다던 오징어순대를 사러 간 거나 마찬가지다.

 조카는 스무 살이 되었다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연예인 못지않게 꾸미고 왔다.

처음으로 탈색을 해봤다며 눈에 띄는 머리 색으로 놀라게 하더니 큰 조카의 세상이다.

장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걷기 시작한 그때였다.

낯가리는 성격이라 생각했던 큰 조카의 모습과는 다르게 갑자기 뒤로 돌아 외친다.

"모두 얼음~~!!!!!!!!!!!!!!!!!! 이러다 다 죽어요~!!"

요새 핫하긴 핫한가 보다.

넷플릭스로 오징어게임을 보고는 배우 이정재의 그 절박한 연기를 따라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너무 놀라 내가 다 자지러질 뻔했다.

놀랍게도 완벽한 성대모사, 명연기로 인해 순식간에 오징어게임에 참여한 기분까지 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지만 부끄러움은 이모 몫이다.




이미 배는 부르지만 숙소에 가기 전에 천천히 돌며 저녁거리를 미리 사기로 했다.

 조카는 역시 오징어순대를 고르고 작은 조카는 닭강정을, 아들의 게사랑은 홍게와 볶음밥으로 대신한다.

무난히도 잘 도와주는 아들 녀석에게 칭찬하고, 추워도 처음 맛보는 벌집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시장을 더 구경하기로 했다.

이때까지도 아들 녀석의 컨디션만 잘 챙겨주면 모든 게 순조로울 줄 알았다.

잠시 방심한 탓일까?

오늘은 아들 녀석이 아니다.

아무래도 큰 조카가 오징어순대가 아닌 오징어게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시장 한복판에서 배우가 된 탑이 오징어게임에서 연기한 타노스의 랩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이쯤에서 억지로라도 조카 사랑은 이모라고 해야겠다.

신기하게도 이번 부끄러움은 뒤늦게 몰려온다.

탑의 빌런 연기마저, 그 랩마저 똑같이 재현하는 모습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소화가 된 우리는 소로 들어와 다 같이 테이블에 앉아 사 온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잘 먹는 녀석들, 오늘은 아들 녀석이 아닌 스무 살 된 큰 조카 녀석의 탈색한 머리 색만큼이나 오징어게임의 명연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직도 얼떨떨하다.

나는 우리 큰 조카가 나와 비슷한 내향형이라 생각했으나 끼가 많은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다.

우리 아들만 폭풍 성장의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니었다.

자주 들여다보는 조카들이라 생각했어도 순간순간이 놀라움의 연속이다.

신랑은 어릴 때부터 보아온 조카들이기에 아들 녀석도 곧 이렇게 클 것이라고 현실적으로 말하지만 내 아들 녀석이 사람들 많은 곳에서 끼를 방출하는 순간이 오리라고는 아직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최근에 신랑도 재밌게 봤던 오징어게임인지라 조카들의 흉내가 마냥 신선하고 재밌었단다.

진심으로 업어 키운 조카들의 모습이 낯 선 순간이지만 특별한 추억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 틀림없다.

남자 조카들만 데려온 여행에서 문뜩 나의 어린 시절과 언니들의 어린 시절, 동생들의 어린 시절을 돌아본다.

하지만 나도 언니들도, 동생들도 참 심심하게 자랐던 것 같다.

별 탈 없이 말이다.

어쨌든 오늘 끼쟁이 조카들의 활약이 심심하지 않아서 좋았고 우려스러운 점이 있다면 아들 녀석이 보고 자지러지게 웃었다는 점이다.

곧 따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상상만으로도 고개를 절레절레, 그러나 이 또한 재미 가득, 추억 가득일 것 같아 기대가 되기도 한다.




이모는 쉬고 있으라며 이모부와 함께 우르르 나가는 녀석들, 바닷가 근처에 왔으면 바다를 봐야 한다나 뭐라나.ㅎㅎ

난 이야기만 들어도 옷깃 사이로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것 같아 생각만으로도 춥다.

모두 나갔으니 먹은 건 먹은 거대로 버리고 분리수거하며 정리한다.

오랜만에 여유를 즐기다가 씻고 나오니 모두들 타이밍 맞게 들어온다.

단순히 바다만 보고 들어온 게 아니었다.

아들 녀석이 눈이 커지며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폭죽놀이도 하고 운 좋게 오리온 별자리?를 봤다가 그중 별 하나가 터지면서 반짝거렸다나?

난생처음 본 광경이라며 모두들 흥분해서 난리다.

같이 못 봐서 아쉬움이 남는 것도 한순간이다.

바닷바람 잔뜩 맞고 들어온 녀석들이 움직이는 대로 찬기가 느껴진다.

즐거워 보이니 다행이고 만족스럽다.

신랑이 오늘은 아들 녀석이 아닌 조카 녀석들까지 책임지고 보호자 역할을 했던 순간이라 더 든든하고 고마운 하루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 형아들과 함께한 불꽃놀이, 함께한 시간들 모두 신난, 그리고 신기해하던 아들 녀석의 모습도 꽤나 흥미로웠던 하루 같아 흐뭇하다.

시간 맞추길 잘했다.

조카들과 함께하기로 한 이번 여행이 즐겁다.




그 와중에 저녁도 먹었는데 신랑 손이 한가득이다.

살짝 무서워진다.

또 뭘 사 왔나 보니 세상에... 내일이면 내 생일이다.

맞다.

내 생일 기념으로 예약했던 숙소이고 여행이다.

내가 내 생일을 잊다니..

다시 한번 결혼하길 잘했다.

신랑 덕분에, 아들 덕분에, 조카들 덕분에 결혼하고 매년 제대로 된 생일을 맞이한다.

가족의 소중함, 모일수록 즐겁고 행복한 순간인 것을 또 한 번 깨닫는다.

오늘은 신나고 즐겁고 추억이 가득한 여행의 순간이자 행복한 시간, 잊지 못할 생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조카 녀석들, 특히나 큰 조카 녀석이 스무 살 됐다고 자신감이 생긴 모습, 오늘의 용기를 크게 칭찬한다.

정말 흐뭇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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