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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Mar 23. 2023

남동생의 키친 테이블 노블


새벽 3시쯤이었을까요? 갑자기 '카톡' 소리가 울렸습니다. 누구지? 급한 일인가 싶어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아서 봤더니 남동생이 '지난번 말한 소설 초안이야'라며 파일을 보내왔어요. 잠이 완전히 안 깬 탓인지, '공대 나온 애가 갑자기 웬 소설을 썼다는 거지? 이거 꿈인가?', 생각하다 핸드폰을 쥐고 그대로 다시 잠들었어요.


아침에 찬찬히 다시 보면서 그제야 한두 달 전에 소설 공모전에 작품을 내고 싶다며 이것저것 물어왔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회사 다니느라 바쁜 사람이 소설을 쓸 시간이 어디 있겠냐 싶어 흘려들었는데 원고지 100매 남짓한 분량의 소설을 써서 보내온 것입니다. 작품을 검토해 달라면서 덧붙인 남동생 말이 왠지 애잔했습니다.


'한번 읽어보고, 그래도 좀 읽히는지, 가능성이 있는지, 아니면 늙어 주책 부리는 것밖에 안 되는지 냉정하게 말해줘. 작가 누나니까 읽어보면 알 것 같아서.'


동생은 공대생이지만 소설을 즐겨 읽었고, 대학 다닐 때도 아마추어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은상을 탈 만큼 문학 분야 창작에도 관심과 소질이 있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이과보다는 문과가 어울리는 동생이 공대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그다지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요즘은 분위기가 또 다르지만 제가 학교를 다닐 때는, 공부 좀 하고 똑똑하다는 남학생들은 으레 공대를 가는 게 수순이었습니다. 좋은 대학 공대를 졸업하고 기업체 연구원으로 가는 진로를 부모들이 선호했거든요.


직장 다니고 아이들 키우며 정신없이 달려온 동생이 중년의 나이에 이르러 소설 쓰기를 시도하다니. 지친 몸으로 새벽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원고를 썼을 동생을 떠올리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동생은 공대를 정말 가고 싶었던 걸까. 혹시 부모님 권유 때문에, 장남에게 거는 기대를 떨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진로였을까. 공대생치고는 문학에 관심이 많다고 가볍게 생각해 왔는데 마음 한편에 창작자로서 꿈이 있었던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되더군요.


저는 줄곧 남동생이 아들이라서 받은 특혜만 의식하며 살아왔어요. 부모님은 수학과외도 동생만 시켜줬고, 아들은 기죽이면 안 된다며 동생과 싸우면 저만 혼내셨어요. 어린 마음에도 퍽 부당하다고 느꼈습니다. 왜 나는 기죽어도 되고 쟤는 기 죽이면 안 된다는 건지, 때론 서운하고 때론 분했어요.


부모님의 차별이 나에게만 제약이 되는 줄 알았는데 동생에게도 족쇄였다는 걸 뒤늦게 깨닫습니다. 부모에게 차별당한 쪽은 참 서럽지요. 그런데 차별받으며 수혜를 입은 쪽도 편하진 않아요. 부모에게서 그만큼 자유롭지 못하거든요. 불필요한 죄책감도 들 수 있고요. 어떻게 보면 부모에게 덜 지원받은 대신 저는 당당히 가고 싶은 과를 스스로 정해서 입학원서를 썼지만, 동생은 원서 쓰는 순간조차 장남이란 부담감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거예요. 부모의 편애와 차별은 양쪽을 다 병들게 한다는 말이 딱 맞더군요.


Photo by Florian Klauer on Unsplash

한 수험생 엄마가 온라인 카페에 사연을 올렸어요. 수시 6장 원서 중에 아이가 3장, 자신이 3장을 정해서 쓰려했는데 아이가 공부만 열심히 했다 뿐이지, 입시 전략을 너무 몰라서 그냥 자기가 다 6장을 알아서 쓰려한다는 것입니다. 수험생을 경험해 본 엄마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래도 아이에게도 선택권을 줘야 하지 않느냐, 지나치게 부모 뜻대로 원서 쓰면 나중에 원망 듣지 않겠느냐, 말리는 분위기였지만 사연을 올린 엄마는 '내 아이는 내가 잘 알고 사랑하니까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길도 내가 제일 잘 정해줄 수 있다'며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어요.


동생이 원서를 쓸 당시엔 공대가 최고였어요. 점수가 비슷했는데 다른 지역 의대를 가게 된 동생 친구가, 서울에 있는 대학이라 집에서 통학하니 좋겠다고 동생을 부러워 한 기억이 납니다. 10년도 안 가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어요. 외환위기를 겪으며 학과 선호도가 바뀌기 시작했고 지금 수능 배치표를 보면 판도가 완전히 달라졌더군요.


아이를 사랑하니까 아이의 앞날을 제일 잘 결정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을 종종 봅니다. 제 동생에게 공대를 권유하던 부모님도 가장 안정적이고 대우가 좋은 진로를 염두에 두며 고르신 걸 거예요. 10년도 안 가 세상이 변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하셨을 테니까요. 예언자도 신도 아니고 부모가 미래를 점치지 못한 걸 두고 누가 뭐라 하겠어요. 다만 예언자도 신도 아니면서 자식에게 인생 꽃길을 점찍어 줄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게 문제겠지요.


동생이 쓴 소설을 읽는데, 전공을 한 것도 아니고 다른 생업에 종사하던 사람이 쓴 것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술술 잘 읽혀 놀랐어요. 무언가를 꾸준히 좋아하고 관심을 갖는 것도 재능이라면 동생은 그런 면에서 분명히 재능을 가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글을 읽어보니 그간 몸은 일상의 파도에 떠밀려 문학에서 멀어졌지만 마음만큼은 문학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소설에서는 동생이 겪었던 힘든 사건들도 언뜻언뜻 드러났는데, 그때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주인공의 입을 빌어 가뭄에 갈라지는 땅처럼 바짝바짝 타들어가던 당시 속마음을 말하더군요. 소설 작법을 정식으로 배워본 적도 없는 사람이 여기저기 물어가며, 이것저것 자료를 뒤져가며 주인공에게 자신을 덧씌워 이만큼 애절한 대사를 쓰기까지, 얼마나 많은 새벽, 잠 못 자고 버텨야 했을까요.


부모에게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받았지만 그 덕에 창작자란 꿈은 평생 마음의 작은 불씨로만 간직해 온 동생이 처음으로 안쓰럽게 느껴졌습니다. '늙어서 주책'으로 보이는지 냉정하게 말해 달라 하는 행간에서 가능성이 보인다는 말을 간절하게 듣고 싶은 진심이 보였어요.


자식의 앞날을 정해주겠다는 부모들이 놓치는 건 단순히 현실적 유익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중년의 나이까지 못 버린 꿈을 부둥켜안고 사는 먼 미래 자식의 마음. 꿈을 시도조차 못한 것에 어느 순간 그를 덮치는 상실감. 부모들은 일부러 외면하는 걸까요, 정말로 모르는 걸까요. 아이는 그저 아이 자신을 위해 태어날 뿐이라는데, 어떤 경우에는 부모의 불안을 잠재우거나 부모의 자식 키우는 보람을 충족시키기 위해 인생을 쓸 것을 강요받습니다.


동생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냈어요. 습작 소설이지만 재미있게 잘 읽혀서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하다고. 소설 쓰느라 지새운 새벽이 동생에게 작은 위안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의 키친 테이블 노블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다음 글귀를 옮겨 봅니다.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는 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키친 테이블 노블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 소설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쓰인 소설이기 때문이다. 스탠드를 밝히고 노트를 꺼내 뭔가를 한없이 긁적여 나간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돌아와 뭔가를 한없이 긁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긁적이는 동안 자기 자신이 치유받는다. 그들의 작품에 열광한 수많은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키친 테이블 노블이 실제로 하는 일은 그 글을 쓰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이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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