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익숙해졌는데 처음 아이폰을 사용할 때는, 오래전 처음 컴퓨터 배울 때처럼 조작이 낯설고 어려웠어요. 아이한테 물어물어 배우는데, 같은 걸 자꾸 물어봐서 아이가 한숨 쉬거나 답답해하는 기색을 보이면 그야말로 가시방석이더군요.
나중에 아이가, "엄마, 내가 좀 짜증 냈으면 미안해. 한번 배울 때 다 숙지하면 좋은데 엄마는 좀 더 가르쳐 줄라 하면, 이제 됐다고, 다 안다고 해놓고 또 묻고, 또 묻고 하니까 좀 그랬어. 다음엔 더 친절하게 알려줄게"라고 말하는데 애들 어릴 때가 생각났어요.
아이들은 한번 배웠다고 금방 숙달되지 않잖아요. 그래서 아무리 쉬워 보이는 것도 반복해서 물어요. 돌이켜보면 어른도 뭘 새로 배우려면 이렇게 힘든데 당연한 거예요. 속좁은 엄마였던 전 때론 한숨 쉬고, 때론 짜증내면서 아까 알려줬는데 왜 또 묻냐고 타박하고 그랬어요. 오히려 지금 아이 태도가 그때 저에 비하면 훨씬 친절한 거네요. 그뿐인가요. 제가 보기에 아이가 너무 쉬운 걸 모르고 있으면, 덜컥 초조한 마음이 들어 더 화냈어요.
그럴 일은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저도 공부도 곧잘 하고, 모범생 소리 들으며 컸지만, 초등학교 고학년까지도 너무나 기본적인 걸 몰라서 학교에서 실수 많이 했거든요. 창피해서 어디 가서 말도 못 해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들도 많고 빠듯한 살림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엄마는 제가 밖에서 하는 실수 같은 것을 일일이 챙겨 보실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어요.
그런 면에서 요즘 애들은 더 힘들지 않을까요? 부모의 관심이 지나치다 못해 일거수일투족에 간섭과 통제를 받으니, 좀 모자란 행동을 해도 그 나이 때 그럴 수 있다고 슬쩍 지나가 줘야 하는데 일일이 지적받지요. 그러면서 더 자신감이 떨어져서 더 못해내는 악순환을 겪습니다. 아이에게 부모는 우주인데 그 우주가 계속 못 마땅하고 미덥지 못하다는 시선으로 지켜보면, 아이가 자신의 잠재력을 꽃피우긴 점점 어려워지겠지요.
얼마 전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갔어요. 아버지는 80세가 훌쩍 넘으셨습니다. 의사를 만나고 잠깐 처리할 일이 있어서, "아빠, 이거 갖고 원무과에 먼저 가 계세요."라고 그랬는데 아버지가 멍한 표정으로 되물으셨어요.
"원무과가 뭐냐?"
텅 빈 표정으로 물으시는데 가슴이 철렁하더군요. 연세가 많아지셨다 해도 인지에 특별한 문제를 보인 적이 없으셨거든요. 그러고 보니 치매를 앓다 돌아가신 큰아버지 생각까지 나서 더 걱정이 되었어요. 큰아버지는 그 옛날에 서울대 나온 전문직이셨고, 숫자를 다루는 현업에 70세 넘도록 종사하셨습니다. 나이 드셨어도 눈빛이 얼마나 초롱초롱하고 목소리도 카랑카랑한지 총기가 대단하셨어요. 그 큰아버지가 80세 넘어 치매를 한동안 앓으셨어요. 가족 행사에서 만난 큰아버지에게 반갑게 인사했는데 누군지 알아보지 못해서 멍하니 보던 그 눈동자가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치매도 다소간의 유전력이 있을 수 있는 만큼 갑자기 원무과를 모르는 아버지를 보면서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도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저기 보이는 간판을 따라가시면 된다고 말씀드렸어요. 주섬주섬 챙겨 걸어가는 아버지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보는데 뭔가 울컥하더라고요. (엄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저에겐 친절한 아빠였어요.
모르는 걸 물어보면 설명해 주려고 항상 애쓰셨어요. 아버지는 정치학을 전공하셨는데 역사나 민족, 전쟁에 관해서 이것저것 귀찮게 물어봐도 열심히 알려 주셨어요. 한 번은 호기심 많은 제 친구가 아버지 서재에 있는 <쿠바 혁명사>를 보고 빌려가고 싶다고 했어요. 당시만 해도 '혁명' 자만 들어가도 금기시되던 시절이었어요. 4.19 혁명도 애써 '4.19 의거'라고 축소해서 말하던 시절이었죠. 말하면 뭐 하나요. 저 대학 1학년 때까지도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금서였어요.
고대 교수였던 황현산 선생님이 쓰신 <밤이 선생이다>에 보면, 이렇게 해외 서적을 구입해서 읽는 것도 쉽지 않았던 시절 이야기가 자세히 나오지요. 학자들조차 서대문 국제우체국에서 거의 사상검증을 당하면서 허락을 받고 겨우 책을 구입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제가 어릴 땐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무 책이나 읽다가는 잡혀간다는 공포심은 여전히 있었어요.
초등 고학년밖에 안 된 친구가 <쿠바 혁명사>를 빌려가고 싶다고 했을 때 난처해하던 아버지가 떠올라요. 그냥 안 된다고 말씀하셨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제 입장을 생각해서 최대한 좋게 말씀하셨어요. 아저씨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봐도 별 문제가 없는 책이지만, 일반인들이 읽으면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 부디 집에서만 보라고 친절하게 일러 주셨어요.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가 우리를 어린애라고 함부로 대하지 않고 존중하려고, 차근차근 알려주려고 애쓴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원무과가 뭐냐고 묻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그때가 떠오른 건 왜일까요. 저도 최대한 아버지한테 친절하려고 노력하게 되더군요.
그 뒤로 아버지가 별 다른 문제를 보이지 않으셨으니 아마 일시적인 현상이었을 거예요. 그래도 언젠가는 더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더 많은 것을 실수하는 시기가 올 수도 있다고 마음의 준비를 해봅니다.
포르투갈 시 중에 이런 시가 있어요.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나이 든 내가 지금까지의 나와 다르다고 해도
부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이해해 주렴
내가 옷에 음식을 흘려도
신발 끈 묶는 법을 잊어버려도
네게 여러 가지를 알려줬듯 지켜봐 주길 바란다.
너와 말할 때 똑같은 얘기를 여러 번 되풀이해도
부디 막지 말고 고개를 끄덕여 줬으면 해
네가 졸라서 거듭 읽어줬던 그림책의 따듯한 결말은
늘 똑같아도 내 마음을 따듯하게 해 줬어
(중략)
즐거운 한때에 내가 무심코 속옷을 적시거나
목욕하기 싫어할 때는 떠올려 줬으면 해
너를 쫓아다니며 몇 번이고 옷을 갈아입히거나
온갖 이유를 대며 싫어하던 너와 함께
목욕했던 그리운 날을"
내 아이가 너무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것 같아서, 제 나이에 안 맞는 실수를 해서, 남들 못 따라가는 것 같아서, 속상하실 때 있죠. 그럴 때 화내지 말고 차근차근 가르쳐 주세요. 모른다고 구박하고, 실수한다고 화내면 나중에 나 늙었을 때 아이도 똑같이 합니다. 배운 게 그거밖에 없으니까요.
물론 나 늙었을 때 대우받기 위해서 지금 친절해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다만 인생은 생각보다 짧고, 부모 자식간 같이 보내는 시간은 그보다 더 순식간입니다. 큰애 대학 보내고 원룸 이사 시킨 다음, 아이 빈방 한가운데서 대성통곡하고 울었던 게 생각나네요.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그렇게 못해준 것만 생각나더라고요. 이렇게 20년 빨리 갈 줄 알았으면 좋은 말 더 많이 해주고, 더 많이 안아주고, 더 많이 사랑해줄걸 싶어서.
부모도, 자식도, 결국은 우리 곁을 다 떠나요. 인생은 소중한 것을 잃어가는 과정이라고 했던가요. 그래서 충분히 아름다운 거겠죠? 영원한 생명이나 영원한 인생은 사실 무섭죠. 오늘 우리 곁의 사람들 많이 사랑해 주며 하루 잘 살아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