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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Nov 24. 2023

학군지에서 학원을 안 보내면 일어나는 일

애매한 중학교 중학년 나이에 학군지에 이사 왔고, 대치동 학원 순례하면서 거의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 취급받은 이야기는 전에 올린 글에서 말씀드렸었지요. 다행히 일대일 개인진도 나가는 곳으로 갔어요. 한 번에 5시간씩 수업했지만, 아이가 시간에 쫓기지 않고 하니까 오히려 좋고, 자기가 틀린 유형의 문제를 선생님이 수없이 많이 프린트해 와서 반복하는 게 좋으며, 설명도 잘해주신다고 해서 매우 만족하며 보냈습니다.


그런데 꼭 그런 사교육 선생님 계세요. 좋은 분들이 더 많겠지만, 공연히 비교하면서 면박 주는 선생님이요. 선생님이 바뀌었는데, 아이는 그 많은 숙제를 단 한 번도 안 해 간 적이 없을 정도로 성실한 아이였는데, 옆자리 6학년 아이가 고등과정하는 걸 아이한테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무안을 줬다고 해요. 저희 아이가 뭐랄까, 완전 운동 에이스고, 배구니 뭐니 반대표 선수하고, 멘탈이 되게 강한 스타일이거든요. 그런 아이가 그 선생님으로 바뀐 지 두어 번만에 표정이 너무 어두운 채 학원에서 오더라고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학원에 더 다닐 필요는 없는 것 같았어요. 아이가 학습태도가 나쁜 것도 아니고, 과제 수행률도 100%인데, 아이가 당장 어찌할 수 없는, '저 아이만큼 선행을 못했다는 것'을 두고 비웃듯이 지적하는 건 교육도 뭣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바로 학원에 끊겠다고 했어요. 아이가 '내가 너무 나약한 거 아니냐'고 스스로 걱정했지만, 저는 '네 나이 때는 네 나이에 걸맞은 고민만 하면 돼. 미성숙한 어른까지 감당할 이유가 없어.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도 아니고'라고 말해줬습니다.


원장과 강사에게 번갈아 전화가 오더군요. 왜 그만두냐고, 불편한 점이 있으면 시정하겠다고 했지만, 그냥 다른 길을 찾기로 했어요. 부모마다 판단은 다르겠지만 공교육과 사교육에서 골고루 종사했던 사람 입장에선, 이럴 땐 억지로 보낼 필요가 없어요. 그러면 안 되는데 못난 어른들 중에 고압적인 태도나 비교, 비난, 이런 걸로 자기 권위를 세우려는 사람이 꼭 있어요. 진짜로 실력 있는 사람은 그렇게 안 해요.


저희 아이는 자기주도적으로 하는 아이였기 때문에 사실 영어도 중학교 1학년을 끝으로 더 이상 학원에 다니지 않았어요. (중간에 몇 번 다녀보다 아이가 혼자 하는 게 낫다고 해서 그만뒀어요.) 학군지 이사 오니 다른 과목은 열심히 하니까 전에 학교에서 받던 점수대로 다 회복되었는데, 영어와 수학은 쉽지 않았어요.


영어는 네이티브처럼 하는 애들이 많다 보니, 그 애들 기준에 맞춰서 학교 영어듣기평가인데도 너무 어렵게 나오더군요. 더구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알아듣기가 힘들었대요. '기러기'로 엄마랑 해외에 거주하다 온 애들도 많고, 단기 영어캠프, 영어 유치원 등은 기본인데, 그런 거 한번 접해보지 않은 아이가 그 속에서 따라잡으려고 애쓰는 게 좀 안쓰러웠어요.


힘들면 학원을 알아봐준다고 했지만 아이가 그러더군요. "엄마, 학원에 가니까 다 같은 커리큘럼, 같은 과제를 내주는데, 나는 내가 약한 부분이 어딘지 알아서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라고 했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더라고요. 듣기평가가 취약한데 학원에서 이 아이를 위해서 따로 듣기 커리큘럼을 짜줄 수는 없잖아요.


두 번째 시험까지는 영어도 망해서, 진짜 한 번도 못 본 점수를 받아오더니, 세 번째 시험에서 갑자기 20점 이상 올려 최상위권이 되었어요. 중학교 마지막 시험까지 그 수준을 유지했어요. 아이가 힘들어한 듣기평가에서도 자신감을 찾아서 어떻게 했냐고 하니까, 고등학교 모의고사 듣기평가를 엄청나게 많이 풀었는데, 그냥 푼 게 아니라 학교듣기평가에 익숙해지기 위해 1.5배속으로 풀었대요. 그렇게 스스로 돌파구를 찾아내는 게 참 기특했어요.



수학도 과외를 하다가 여름방학 때 학원을 가보려 했더니 들어갈 반이 없더라고요. 또 2차로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 취급당했습니다. 다행히 착한 원장님이 2회 차로 시작하는 반이 있으니, 그 반에 넣어준다고 하셨어요. 걔들은 두 번째로 시작하는 거라 아이가 따라가려면 노력을 많이 해야 할 거라면서. 저는 잔뜩 긴장했는데 아이는 무슨 자신감인지 겉으론 담담하더라고요. 그리고 첫 주 수업을 마치고 시험을 본 후에 아이가 말했어요.


"엄마, 애들 2회차라며? 내가 제일 잘 봤는데?"


한번 돌렸다 한들, 대부분의 아이들이 잊어버리는 거죠. 며칠 전에 제가 자사고 입학설명회를 갔다 왔는데요, 거기 수학선생님이 "듣는 공부를 하고 자기 공부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학원 따라 진도 나가고 문제 풀었다고 자기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라고 강조하던데 공감합니다.


혼자 선행 안 했다고 아이도 좀 걱정하는 눈치였는데 의외로 수월하게 따라갔어요. 그러나 한 달 만에 아이가 혼자 하는 게 낫다고 말했어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오는 자물쇠반 같은 분위기(교실에 창문도 없다고)가 답답하고, 자유롭게 질문하는 애들이 없어서, 자기만 너무 혼자 질문 많이 하게 되어 불편하다고 했습니다. 질문하는 아이가 없어 어차피 강의식으로 이루어지는 수업이라면, 인강 강사만큼 잘 가르치는 사람 없다면서 혼자 하겠다는 거예요. 모르는 부분은 인강도 활용하고, 요즘은 수학풀이해 주는 앱 같은 것도 있다나요.


그렇게 현재 혼자 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학군지 이사 온 후, 수학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어요. 영어는 그래도 점점 성적이 올라가는 게 보였는데 수학은 만만치 않았어요. 이곳에서 수학은 아이에게 좌절감을 안겨준 과목이었지요. 원래 수학 좋아하던 애가 수학을 점점 미워하더라고요. 그런데 혼자 공부하던 아이가 말했어요.


"엄마, 학원이나 과외를 할 때는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화가 나거든. 빨리 해야 하는데, 한 문제 갖고 너무 시간 끌게 되니까. 근데 혼자 하다 보니 어려운 문제 하나를 갖고 계속 생각하게 되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번뜩이며 풀이방법이 생각나. 그때 뭔가 짜릿하고, 희열이 정말 커. 그러고 보니까, 아 내가 이래서 수학 좋아했었지, 생각이 났어. 그리고 너무 재밌어지는 거야. 재미있으니까 많이 풀게 되어서 결국 하던 양은 학원이나 과외 다닐 때랑 비슷하게 해."


<몰입>을 쓴 서울대 황농문 교수님도 이 점을 강조했어요. 어려운 수학 문제 하나를 갖고 오랜 시간, 하루든 이틀이든 붙잡고 고민해 보는 거요. 뇌의 시냅스가 이때 막 서로 연결되고 폭발적으로 발전하면서 소위 머리 좋은 아이, 수학 잘하는 아이가 되어 가는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학원 진도 따라가기 바쁘고, 학원 숙제 하느라 바쁘면 한 문제 갖고 어떻게 하루를 고민하나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많은 양을, 아이들의 수준과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해내라고 강요하는 어른들은 수학을 잘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일 겁니다. 그건 수학을 잘하게 되는 방법이 아니거든요. 김현수 선생님의 <요즘 아이들 마음고생의 비밀>에 나온 "수학으로 쌓아올린 지옥에 갇혀 산다. 그러나 곧 탈출할 계획이다"라고 하는 아이들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해요.


아이는 더딜지언정 교과내용을 꼭꼭 씹으며 제속도대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초등 의대반 보내고, 특목고 보내고, 이런 로드맵이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에게, 이런 방법은 안 맞겠죠. 그런데 <과학이 가르쳐준 것들>에서 이정모 교수님이 말한 것처럼, 우리 아이들은 최소 120세, 최대 142세까지 사는 시대래요. 이 시대에서 학벌이 보장해 주는 건 생각보다 매우 제한적이고, 그 기간도 점점 짧아질 거라고 합니다. 최재천 교수님도 우리 아이들은 직업을 예닐곱 번 바꾸게 되는 시대에 살 거라 했고요. 이때 중요한 건 '회복탄력성'이래요.


교육과 관련된 분들이 입을 모아 말합니다. 실패에 무딘 사람, 실패하는 훈련을 한 사람, 실패에도 자존감이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고요. 그래야 많은 도전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려면 실패했을 때 비난이나 지적보다는 격려를 받아야 하는데 우리 청소년들의 현주소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방영된 EBS 다큐에서 청소년들이 '점수가 곧 나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 살아보니 점수가 곧 자신은 아니라는 거, 사람은 참으로 입체적인 존재라는 거, 생각하게 되지 않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받는 메시지는 획일적인 기준으로 줄 세운 대열 속에, 그 위치가 곧 '너의 전부'라는 것이다 보니 애들 맘이 병들어 가는 것 같아요.


저희 아이가 앞으로 승승장구할지 안 할지 그건 저도 모릅니다. 그리고 반드시 승승장구해야만 한다고 생각도 안 하고요. 다만 현재 아이의 여러 발달상황을 봤을 때, 제가 보기엔 몸도 마음도 그 나이대로, 비교적 건강하게 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가 선행을 안 해서 들어갈 반이 없다고, 영어 유치원에 안 다녔다고, 중학교 가서 기죽을 것 같다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부모가 아무렇지 않아 하면 아이도 아무렇지 않게 잘 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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