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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Oct 22. 2023

꿈의 크기

한때 '가난하다고 해서 꿈조차 작을 수는 없다'는 말이 유행했어요. 커가는 아이들이 가정 형편에 따라 자기 꿈의 크기를 결정한다면, 그런 사회는 비극이라고. 동감합니다. 아이가 처한 환경적 제약 때문에 꿈조차 작거나 찌그러지면 안 되겠죠.


엄마로서 글을 쓸 때도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었어요. 한창 자라는 아이는 아니지만,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초보작가는 성장기 아이가 겪는 감정의 풍파를 비슷하게 겪는 것 같아요.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내 꿈을 받쳐주지 못하거나, 심한 경우 방해한다는 느낌이 들면서 마음이 아득해지는 순간이 오는 거죠.


원래 저는 대학 시절부터 막연하게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실제로 전공 교수님 중에 소설가로 작품활동을 하는 분이 계셨는데요, 이 분이 워낙 독설로 저희 과에서 유명했습니다. 동기 중에는 교수님 독설에 자기는 영 재능이 없는 것 같다며 이른 나이에 '절필'을 선언한 친구도 있었어요. 그런 교수님이었던 만큼, 저에게 잘 쓴다고, 정진해 보라는 식으로 말씀하셨던 게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지요. 그때 수강했던 문예창작론 시간은 지금 떠올려도 들뜨고 설렌 기억이에요. 제가 쓴 글이 교수님에게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으면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기분 좋았어요. 그대로 작가 대열에 올라갈 것 같고 그랬지요.


하지만 그 뒤로 졸업과 취업, 결혼과 출산 등 내 의지로 선택했지만 막상 내 의지대로 통제되지 않았던 여러 일을 겪으며 소설가로서 꿈은 저만치 멀어졌었어요. 그렇게 희미해진 소설가의 꿈이었건만, 오랜 시간 독서모임을 하면서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소설로 습작을 시작했는데 아직 손이 가는 올망졸망한 유치원생, 초등생을 키우는 주부 입장에서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요. 소설 주인공이 계란을 먹는 장면을 쓰다 보면, '아, 계란 떨어진 거 사 와야 하는데' 생각이 나고 작품 속 인물의 감정에 이입하려고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문밖에서 어김없이 '엄마, 이것 좀 봐봐' 아이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소설을 구상하느라 고민하는 시간은 좋았어요. 오늘 하루의 걱정, 무료함, 허전함을 다 잊게 만들어 줄 만큼 강력한 즐거움이 되어 줬지만, 작업에 진전이 생기지 않는 데서 오는 좌절감은 자꾸 커졌습니다. '자기만의 방'은커녕, 하루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1시간을 내는 것도 쉽지 않았거든요. 은희경 작가님이 첫 소설을 쓸 때 절에 들어가 몇 개월간 집필에 몰두하셨다고 하지요. 저도 잠깐 절에라도 들어갈까, 생각했지만 현실적으로 아이들은 누가 봐줄 것인지, 전혀 답이 안 나오는 문제였어요. 글을 쓰는 즐거움보다 글을 쓰지 못하는 환경, 글을 쓸 시간도 공간도 없음에 대한 원망이 자꾸 쌓여갔어요.


고민 끝에 긴 호흡으로 집중해야 하는 소설은 다음을 기약하고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어요. 에세이는 생활의 단상을 확장해서 쓰게 되는 글쓰기 분야인 만큼, 일상의 작은 순간도 포착하는 게 중요하지요. 그러고 나니까  아이들과 아웅다웅 보내는 매일을 달갑게 받아들이게 됐어요. 글쓰기 소재가 쏟아졌거든요.


기분 좋고 신나는 일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슬프고 우울한 일은 또 그것대로 글감이 되니 다행이란 생각마저 들었죠. 그래서 보르헤스가 인생에서 좋은 건 그대로 둬도 되지만 불행, 패배, 실패 등 나쁜 것은 시로 바꾸라고 한 걸까요. 저는 시는 아니지만, 에세이를 쓰면서 일상의 여러 사연이 고달프면 고달픈 대로, 흥겨우면 흥겨운 대로 지면에 붙잡을 에피소드가 되어  반갑게 느껴졌어요. 무조건적인 감사나 근거 없는 낙관을 경계하는 편이지만 일상을 글로 포착할 수 있는 눈이 생긴 건, 분명 에세이란 장르가 저에게 준 선물이지요.


빙 이미지 크리에이터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예전에 전시회를 갔다가 화가로 활동하는 분들을 만난 적이 있어요. 제가 책을 낸 작가라고 하니까 부럽다며 그냥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 글을 쓸 수 있지 않냐고 물으셨어요. 화가들은 반드시 작업실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더구나 부피가 큰 작품을 만들거나, 대형 캔버스 작업이라도 하려면 작업실도 덩달아 같이 커져야 하니 작업실 대여도 현실적으로 큰 부담이 되는 거지요. 그때 한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작업실 크기가 작으면 작은 캔버스 여러 개에 그림을 그려서 이어 붙이면 된다고.


그 말씀을 듣는데 뭔가 머릿속에서 불빛이 반짝였어요. 늘 시간에 쫓기고, 매달 따박따박 인세가 들어오는 작가도 아닌 처지에 작업실 같은 건 언감생심 꿈꿀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이 모두 부족한 엄마 작가에게 너무나 큰 힌트가 되는 말씀이었어요. 에세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글쓰기에 정진했던 것도 돌이켜보면 비슷한 맥락이었던 거지요. 언젠가 저의 수많은 에세이가 모여 또 다른 장르의 글쓰기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 그런 꿈을 꿀 수 있잖아요.


출간 기념회에서 한 분이 주신 질문이 떠오릅니다. 엄마 작가로 자리매김하고 싶지만 현실적인 장벽 앞에서 어려움을 느낀다고요. 아마도 제가 처음에 글을 쓰면서 느꼈던, 아니, 어쩌면 새벽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가끔은 느끼게 되는 막막함일지 모르겠어요.


"뭔가를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체력도 안 되고 예전처럼 젊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고 집에는 할 일이 넘칩니다.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뭔가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은데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제가 그 문제들을 대단하게 이겨낸 사람이라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닐 거예요. 앞서 언급한 화가 분의 말씀처럼, 작업실이 너무 좁아서 큰 그림을 한 번에 그릴 수 없다면, 작은 캔버스 그림 여러 개를 이어서 작품을 완성하면 되는 거예요. 주부와 엄마라는 자리를 지키면서 글을 쓰기가 여전히 만만치 않지만, 이른 새벽 조금씩 써나가는 데 이 주문은 꽤 힘이 됩니다. 여러분도 지금 머물고 있는 자리에서,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시작하시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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