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한중에서 한업이 열리다

석문잔도, 한중(漢中)

by JUDE

많은 국가들이, 외부에서 부르는 이름과 자국민들이 스스로를 칭하는 이름이 다른 경우가 많다. 네덜란드를 네덜란드 사람이 말할 때는 홀란드, 우리가 우리를 말할 때는 한국이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영어표기인 China 는 진시황이 세운 바로 그 진(qin) 나라를 뜻하지만, 중국인들이 스스로를 지칭할 때는 한(漢)이라고 하고, 거기에서 출발된 민족이 한족(漢族)이며, 언어는 한어(漢語), 문자는 한자(漢字)다.

L1250649.JPG 한중이야 말로, 오늘 날 중국이 시작된 곳이라고 할 수 있는 도시다.


중국 역사 속 최초의 통일 왕조는 진시황의 진이지만, 겨우 15년 만에 멸망한 왕조를 중국의 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한(漢)의 시작은 어디일까.


조조의 아들 조비에 의해 멸망하기 까지, 약 4백여년 이어진 한을 세운 사람은 다름 아닌 항우와 유방 으로 익숙한 바로 그 유방이며, 한중(漢中)은 그가 아직 항우에게 굴복해 꼬리를 내릴때부터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스크린샷 2017-11-02 오후 6.57.12.png 청두에서 한중을 지나 시안에 이르는 저 길이 바로 촉도(蜀道) 다.


단지 역사적 의미 뿐만 아니라, 지도에서 봐도 한중은 중원으로 진출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청두에서 옛 장안인 시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이며, 이 때문에 공명 역시 집요하게 조조를 압박해 마침내 한중을 얻어낸다.


청두에서 덕양, 면양, 검각, 광원, 한중을 거쳐 시안에 이르는 약 800km 의 저 길을 촉도(蜀道) 라고 부르는데, 유비가 죽은 뒤 공명이 북벌을 일으켜 행군 했던 바로 그 길이다. 지금이야 도로가 뚫려있지만 1,800년 전 그 때 저 길을 걸어서 갔다는 것이,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이백은 "촉으로 가는 길은 하늘을 오르기보다 어렵구나" 라는 말로 일찍이 그 어려움을 표했다. 나는 한중의 어딘가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라 기대했고, 마침내 한중 시내에서 10km 정도 떨어진 석문잔도(石門棧道) 풍경구 에 이르렀다.

L1250931.JPG 한고조 유방(가운데)과 건국공신인 소하(왼쪽), 한신(오른쪽)


그 오랜 역사적, 지리적 가치를 증명하듯 석문잔도 풍경구 안은, 삼국지 뿐 아니라 한나라 유방을 시작으로 하는 중국의 모든 역대 인물과 전투를 표현한 석상과 그림들로 가득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한고조 유방의 석상이다.


왼쪽에 소하, 오른쪽에 한신을 두고 가운데 우뚝선 유방의 앞에 서니, 학창시절 닥치는 대로 읽어댔던 중국 고대사 속의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속을 스쳤다. 죽어서 신의 반열에 오른 관우와 제갈량 조차도, 한중에서만은 조연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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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개한업 : 한중에서 한업이 열리다.


도원의 결의, 제갈량의 북벌 등 무수히 많은 고사를 재현한 동상을 지나, 한중개한업(漢中開漢業) 이라고 새겨진 바위와 마주쳤다. 유방이 세운 한나라, 그 유지를 잇고자 스스로 한중왕에 오른 유비.


황충이 조조군의 총사령관 하우연의 목을 베는 그 순간 승부는 판가름이 났고, 유비는 스스로 한중왕에 올라 마침내 조조와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 그리고 한의 재건 이라는 신념을 직접 온 천하에 공표하는 그 장면은, 삼국지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사실 동탁, 조조, 원소, 손견 등 유비보다 한참 먼저 군주의 반열에 올라섰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개인의 욕심을 뛰어 넘어 황실을 위해 뜻을 펼친 사람은 유비가 유일하다. 그 결과 오늘날 유비는, 명실공히 삼국지의 주인공으로 자리잡았으며, 신의 반열에 올랐다.


L1250814.JPG 절벽을 따라 이어진 고대 잔도.


한편, 산책로 오른쪽으로는 포하계곡을 가득 매운 황톳물이 한중을 향해 거세게 흘렀고, 좌우 협곡으로는 바람에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한 나무다리가 아슬아슬하게 메달려있었다. 유비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제갈량이 그의 유지를 받들어 진군했던 바로 그 길이다.


잔도(棧道) 라고 불리는 그 절벽 길은 전국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데, 촉으로 들고 나는 유일한 통로였다. 항우가 유방을 한중왕으로 봉했을 때, 유방은 한중에 입성한 뒤 직접 잔도를 모조리 불태워, 중원 진출에 대한 의지가 없음을 보였다는 고사가 전해질 정도다.


나무가 썪어 언제 부서질지 모를 모습으로 남은 저 잔도가, 지난 천여 년 동안 몇 번이나 훼손되고 몇 번이나 고쳐 졌을지 상상조차 쉽지 않다. 대단한 기교가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그 자체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건축물이다. 70년대 중국 정부가 이 곳에 거대한 댐을 건설하기 전까지는, 콘크리트로 튼튼하게 재건축된 지금의 산책로 자리에서 80m 아래 위치에, 고대의 잔도들이 제법 그 모습을 갖춘 채 남아있었다고 한다.


L1250832.JPG 석문 댐의 건설과 함께 고대 잔도는 모두 물속에 잠기고 만다.


그러나 댐의 건설과 함께 강 수위가 높아지면서, 댐 상류에 있던 모든 잔도들은 수몰되고 말았다. 어째서 그런 멍청한 결정을 했는지 이해는 할 수 없었으나, 댐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만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강의 상류로는 고요하고 잔잔한 강물이 햇빛을 받아 옥빛을 드러냈고, 아름다운 숲을 따라 새롭게 지어진 산책로의 사람들은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류쪽 풍경은, 촉이 얼마나 험난한 곳인가를 여실히 드러냈다. 커피우유색 강물은 지칠줄 모르고 휘몰아 쳤고, 좌우로 깍아지른 듯한 산길의 위용은 어마어마했다. 산책로 보다 30미터 정도 위로 차가 다니는 도로가 건설되어 있었는데, 그 조차도 금방이라도 무너질듯 아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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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 댐 위에서 한중을 바라본 풍경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한중을 포기했던 조조의 심정이 절로 이해가 갔다. 그 역시 이 자리에서 이 풍경을 봤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 길을 따라 진군해 익주를 차지하겠다는 꿈을 접었을 것이다. 두 명이 나란히 서기에도 비좁은 협곡 위 다리를 보강하면서 행군하는 것이 상상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조조는 그 유명한 계륵(鷄肋) 이라는 말을 남긴 채, 한중에서 후퇴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제갈량은 대체 얼마나 집념이 강한 인물인가 새삼 느낀다. 그는 군주도 아니었으며, 유비처럼 한의 후예도 아니었다. 그가 북벌을 할 당시에는 이미 조조, 유비, 관우, 장비등 1세대들이 모두 죽은 뒤였고, 행여나 조조도 포기한 촉 정벌을 그의 아들 조비가 강행할 이유도 없었다. 아마도 제갈량이 마음만 먹었다면 촉에서 아주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익주를 차지해 그의 비전이었던 천하삼분의 계는 완성이 되었고, 이제 한중까지 손에 넣었으니 촉의 앞날은 여전히 밝았다. 심지어 유비는 죽을 때, 제갈량으로 하여금 직접 촉을 다스리라고 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고난의 길을 걸었다. 그것도 평생에 걸쳐 여섯번 씩이나. 그것은 오로지 자신을 믿어주었던 군주와의 약속 때문이었으며, 그야말로 유비의, 유비를 위한, 유비에 의한 북벌이었다. 아마도 우리가 삼국지를 사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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