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기 전에 내가 부모님과 같이 살던 시절 진돗개를 길렀다는 사실을 밝혀두고 싶다.(주로 베개 용도로 쓰긴 했지만) 이름은 '강우'였다. 별 의미는 없고 경상도 사람이 발음 새지 않고 부를 수 있는 쉬운 이름으로 지었다. 북극곰처럼 새하얀 털에 안테나처럼 우뚝 선 꼬리, 처진 눈매가 특징인 백구였다.
마당이 넓은 탓에 묶어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 길렀는데 어느 날 녀석이 집을 나간 뒤 며칠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부모님은 며칠 지나지 않아 '강우 2'를 데려왔다. 역시 새하얀 털에 눈이 처진 백구였다. 내가 적당히 울지 않는 나이가 될 즈음에 입양을 보내긴 했지만.
개는 사람과 비슷하다. 친구이자 충실한 동반자 역할을 한다. 길들여지고 사회적이며 위계를 따른다. 게다가 서열이 위든 아래든 항상 인간을 반기는 위대한 생명체다. 하지만 고양이는 전혀 다르다. 서열 따위에 굴복하지 않고 길들여지는 것도 거부한다. 재롱을 부리지도 않고, 주인이고 나발이고 한번 안으려고 하면 금세 앙칼지게 손톱을 세운다. 이름을 불러도 돌아봐주지 않는다. 한마디로 내 쪽의 이해심이 커야만 기를 수 있는 동물이다.
인류에게 가장 사랑받는 두 동물은 이렇듯 서로 완전히 다르다. 이 둘을 동시에 키우는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다. 인간은 30여 년을 모르고 살다가 남은 평생을 같이 살기도 하는데, 유독 개와 고양이만은 그렇다. 사람도 두 분류로 나눌 수 있다. 개파와 고양이파. 물론 나는 전통적인 개파였다.(고양이보다 개를 더 선호하는 사람)
몇 년 전 중국 운남성을 여행한 적이 있는데 수도인 쿤밍에는 유독 개가 많았다. 주인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짝짓기 하러 끌려 나온 개도 많았지만, 주인 없는 개는 더욱 많았다. 너무 많아서 골목길을 돌아 다른 번지수 앞에서 마주친 개가 조금 전의 그 개인가 아닌가 긴가민가 할 정도였다. 거리가 지저분한 것은 물론이고, 인도 위의 똥이 사람의 것인지 개의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중국에서는 사람이 길거리 쓰레기통에 똥을 싸는 장면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돌아오는 길에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도쿄에 들렀는데 새삼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길냥이들이 부쩍 눈에 띄었다. 운남성의 주인 없는 개들 만큼이나. 일본의 거의 모든 가게는 카운터에 마네키네코(한쪽 앞발로 사람을 부르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고양이 인형)가 있는데, 그걸 본 순간 엉뚱한 생각을 시작했다.
'세상은 개의 나라와 고양이의 나라로 나눌 수 있구나'
개와 고양이를 동시에 키우지 않듯이 나라도 개의 나라와 고양이의 나눌 수 있다. 구분하는 기준은 하나다. 개와 고양이 중에 무엇을 더 흔히 볼 수 있는가? 개의 나라는 대체로 지저분하고 낙후됐으며 고양이의 나라는 비교적(훨씬) 깨끗하다. 상대적으로 전자에 치안이 불안한 나라가 많다. 나름대로 이론을 정립한 뒤, 지난 수년간 여행했던 마흔 개가 넘는 나라의 기억을 되새김질했다. 그랬더니 뚜렸하게 특정 동물이 더 많았던 나라들은 위 이론에 얼추 들어맞는 게 아닌가.
남미에서 가장 개가 많았던 곳은 칠레다. 수도 산티아고조차도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면 거의 모든 가게 앞에 주인 없는 개가 햇살 비치는 자리를 차지하고 행인을 올려다보고 있다. 딱히 건드리는 사람도 없는지 상처나 스트레스를 받은 흔적은 없어 보였다. 어떤 녀석은 대범하게 가게문을 차지하고 앉아 들어가려면 양해를 구해야 하기도 했다. 기르는 개냐고 물어본 적도 있는데 아니라고. 어쨌든 사막과 빙하, 온천까지 아름다운 건 죄다 가진 칠레지만, 그 거리가 깨끗했다고는 못하겠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나라지만, 나라 전체에 아직은 '제3세계'라는 느낌이 감돈다.(물론 남미가 전반적으로 그렇다)
유럽에서 개가 가장 많았던 나라는 파리다. 재밌는 건 파리의 개는 대부분 주인 있는 개였다. 한컷 미용을 하고 치장한 개들이 줄에 묶여 거리를 활보한다. 반면에 파리를 찾은 여행자는 개똥을 피해 걷기 바쁘다. 귀는 핑크색, 앞발은 파란색, 수염은 검게 염색한 비숑프리제의 똥구멍이 벌어지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바게트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 내 처지가 새삼 안쓰러워 셀프 팔짱을 끼곤 했다.
그 유명한 센강도 직접 보고 나면 아마 거기서 크루즈를 타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젖은 쓰레기에서 나는 냄새가 난다. 그럼에도 센강을 따라 이어진 길에는 미술품과 고서적을 파는 가판대가 가득한데 냄새나는 것은 참아도 아름답지 못한 것은 용서 못한다나 뭐라나. 취향은 존중해 드립니다만 파리 지하철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더러움의 끝판 왕이다. 끝도 없는 낙서(그라피티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와 화장실에서 나는 냄새가 눈과 코를 공격한다.
재밌는 건 거리가 온통 개와 비둘기 똥으로 뒤범벅인데도 파리는 완전히 사랑으로 가득 차있다. 거리에는 다들 어디서 왔는지 온통 커플들 뿐이다. 뤽상부르 공원 잔디밭에 돗자리 하나 펴고, 바구니에서 와인을 꺼내며 키스하는 연인들, 정각이 될 때마다 점등하는 에펠탑 아래에 있으면 '쪽' 하는 소리가 6중주를 이룬다. 한 번은 리옹에 사는 프랑스 친구가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다. 한국을 떠나기 전 나와 함께 남산 전망대에 오른 녀석은 한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왜 한국사람들은 키스를 안 하냐'였다. 여하튼 그 외 개의 나라는 이집트, 필리핀, 미국, 남미의 대부분의 나라 등이 있다. 특히 미국의 거리에는 개뿐만 아니라 노숙자가 넘쳐난다.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의 밤거리에는 노숙자들의 술냄새 때문에 현기증이 난다.
이번엔 고양이의 나라로 가보자. 일본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여름이면 그늘, 겨울이면 햇빛 아래 어디에도 고양이가 있다. 단순히 개체수가 많을 뿐 아니라 일본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대게는 기르는 고양이인지, 길냥이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고 예쁘다.
물론 일본의 거리가 깨끗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흡연에 관대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아직 가게에서 흡연이 허용되는 곳이 많다),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면 얄짤없다. 어디선가 말끔한 정복은 입은 여성이 나타나 배꼽 아래에 양손을 올리고 '죄송하지만 거리에서는 흡연을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면서 재떨이를 꺼내 피다만 담배를 수거해간다. 그리곤 홀연히 사라지는데 무슨 훈련받은 닌자 같다.
의외로 터키도 고양이의 나라다.(사실은 터키시 앙고라라는 전천후 인기종의 보유국) 이쪽은 조금 독특해서 고양이들이 가게 안을 자유롭게 오간다. 보통의 고양이들처럼 사람이 다가오면 노려보다가 점프해서 사라지는 일도 없다. 개에 가까운 행동을 쉽게 보인다. 나는 어느 가죽 공예품을 파는 가게에 들어가서 표범무늬가 새겨진 고양이를 둘러업고 한참 놀다 나왔는데, 거리의 모든 가게들이 공동으로 길냥이들을 기르고 있었다. 궁금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이슬람의 선지자 무하마드가 고양이를 귀여워했다고. 특히 머리에서 등까지 호랑이 무늬가 있는 고양이의 머리털 색깔을 '무하마드의 다섯 손가락'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케밥 구이집 근처에는 고양이가 넘쳐났는데, 점원은 굽다 남은 고기 찌꺼기를 아낌없이 던져주곤 했다. 덕분에 나는 이스탄불의 거리에서 고양이를 만나면 쓰다듬기 바빴고(보통은 그런 기회를 주지 않으니까), 바닥은 깔고 앉아 뒹구르기에 충분히 깨끗했다. 궁금하다면 구글에 istanbul cat이라고 검색해보자. 세상에서 이쁜 고양이는 죄다 볼 수 있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은 원래 개의 나라였다. 90년대만 해도 거리에 쓰레기 통을 뒤지는 개가 넘쳐났다. 그러다 엄격한 분리수거가 실시되고, 보도블록 공사가 활발히 일어나면서 지금은 거의 고양이와 개가 반반인 나라가 된 듯하다. 거리도 놀라울 만큼 깨끗해졌다. 신촌을 보라. 불과 5년 전만 해도 신촌은 '젊음의 거리'가 아니라 '쓰레기의 거리'였다. 보행자 우선 거리로 탈바꿈하고, 간판을 재정비한 지금의 신촌을 걷고 있으면 한국이 아니라 일본에 와 있는 기분이다.
며칠 전에는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러 나갔다가 1층 주차장에서 고양이 한 마리와 마주쳤다. 몹시 추운지 햇빛 아래에서도 털이 떨리는 것처럼 보였는데 참지 못하고 뽁뽁이가 둘러진 박스 하나를 가져다 주웠다. 찬장에 있는 참치캔을 가지고 다시와 보니 녀석은 한층 안정된 자세로 박스 안에 자리를 잡았다. 다음날 출근길에는 박스도 캔도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고양이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지저분하고 낙후된 게 개 때문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본디 개파였고, 둘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엉뚱한 생각을 많이 하는 여행자일 뿐. 그러나 이제는 개파라고 자신 있게 외치진 못하겠다. 그만큼 고양이도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레이저 포인트나 장난감으로 주의를 끌면 나오는 그 멍청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사랑스러워 미친다. 할퀴든 말든 하루 종일이라도 안고 있고 싶다. 글을 쓰다 보니 이 이론에 좀 더 확신을 얻고 싶어 졌는데, 다음에는 북유럽을 가볼 생각이다. '노르웨이 숲'을 보건대 깨끗할게 뻔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