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샐러리맨의 우울 #11.
이제 직장인 중에서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듯하다.
이 단어가 정확히 언제부터 등장했고, 누구나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으로 어떻게 자리 잡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처음 '워라밸'을 접했을 때, 단어가 지닌 지극히 매력적인 의미에 기대어 시궁창 같던 현실을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해 주리라는 일종의 기대감 같은 것이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많은 직장인들은 '워라밸'을 꿈꾼다.
회사에서 노동을 하느라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붓고는 정작 개인의 삶은 누릴 여력조차 없는 암울하고 피폐한 생활이 아닌, 퇴근 후에도 개인의 소중한 일상이 보장되는 일과 삶의 건강한 균형!
최근 채용 관련 정보를 살펴보면 회사를 판단하는 기준에 '워라밸'이라는 항목이 꽤나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회사를 선택함에 있어서 연봉, 복지, 성장 가능성, 고용 안정성 등과 더불어 개인 삶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내 분위기가 중요한 고려 요소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재직 중인 회사에서도 이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시차출근제, 집중근무시간, 집중근무공간 등을 운영하며 일과 삶의 균형 잡힌 생활을 지원하고자 애쓰고 있는데 과연 대단한 변화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우리는 '워라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
'After 6 Life'를 부르짖는 그들이 바라보는 '워라밸'이란 과도한 업무를 줄여 정시 퇴근을 보장해 주고, 퇴근 후에는 일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하며, 그렇게 확보된 시간 동안 온전히 내가 원하고 누리고 싶은 삶에 집중한다.
대충 이런 정도의 느낌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워라밸'이라는 단어 자체에서도 알 수 있듯, 일과 삶 그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누리게 될 여가만큼 업무적 성과도 그 수평대 위에 함께 올려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말 테니까.
이는, Life의 보장만큼 상대적으로 Work가 회사에서 본인의 자리를 위협하는 요소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적어도 개인의 여가를 보장한다는 의미가 일을 더 적게 하고 대충 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닐 테니...
'워라밸'을 원한다면 그만큼 더 효과적이면서도 효율적으로 일해야 하고,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너는 어떤 종류의 손해도 감수해야 한다.
그렇기에 '워라밸' 시대, 우리는 더 치열해지고 더 각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얼마 전, 회사에 '출퇴근관리시스템'이 도입되었다.
본인의 퇴근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컴퓨터가 셧다운 되어 '워라밸'을 적극적으로 돕는 그런 시스템이었는데 장시간 자리를 비울 때에도 타당한 이유에 대해 보고를 해야 근무시간으로 인정받는다.
이제 동료와의 여유 있는 커피 한 잔에도 특별한 목적을 부여하지 못하면 용납될 수 없는 '워라밸'이라는 단어의 함정에 빠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