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샐러리맨의 우울 #20.
"이게 무슨 의미지? 표현이 좀 모호한데... 이렇게 바꾸는 건 어떨까?"
"이 부분은 의미가 모호하다는 이유로 이미 수정을 지시하셨던 부분입니다. 방금 말씀하신 대로 표현하면 수정 전으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그전에 어떻게 했었는지는 내 알 바 아니니 잔말 말고 지금 말한 대로 수정하도록 해."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팀장으로부터 수정에 대한 피드백을 받게 되었다.
표현 방식이 모호하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여기서 문제는 지적받은 부분이 불과 얼마 전에 이미 모호성을 이유로 수정을 지시했던 바로 그 부분이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지시한 대로 수정이 될 경우 원래 의도와 다르게 의미가 모호해질 수 있으니 재고(再顧) 해 줄 것을 요청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모호성 때문에 수정을 지시했다가 모호성 때문에 또다시 원상복귀를 지시하는 꼴이라니...'
확고한 신념으로 밀어붙이던 수정에 대한 의지가 어느 순간 180도 뒤집어져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지루한 번복의 과정이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반복해 웃음을 쥐어짜 내는 한심한 코미디 같아 왠지 모를 허탈감이 밀려왔다.
회사에서 업무를 하다 보면, '맞다-틀리다'의 지나친 가변성 때문에 마치 롤러코스터에 올라 탄 것처럼 어지럼증이 느껴지곤 했다.
대상에 따라, 시기에 따라,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時時刻刻) 변하는 '기준'은 어차피 회사에서의 일이란 업무담당자의 생각이나 노력에 의해 결정되기보다 의사결정자에 의해 좌지우지됨을 의미했고, 우리는 그냥 그 기준에 스스로를 끼워 맞춘 채 그럴싸한 결과물을 찍어 내기만 하면 되는 지극히 수동적인 배역의 조연에 불과했다.
하지만 종종 견딜 수 없었던 건, 팀장 개인의 편협한 주관성에 기초하고 있는 가치판단이 무슨 대단한 통찰력에 기반한 심도 깊은 의사결정인 냥 거들먹대는 태도였다.
어차피 그 또한, 외력(外力)에 의해 손바닥 뒤집듯 너무도 쉽게 바뀌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우쭐거림 역시 자기 지위에 대한 당위성을 인정받으려는 과장된 행동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회사가 말하는 '기준'과 '원칙'이란 한 번의 파도에도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릴 모래성처럼 그렇게 쉽게 허물어 버려도 아무렇지 않은 그런 하찮은 것이었던가.
그리고 언제 또 무너져 내릴지 모를 그 위태로운 기반을 딛고서 오늘도 고군분투 중인 우리는 과연 어디에 무게 중심을 맞춘 채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회사라는 조직에서 절대적인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변하지 않는 '원칙'이란 더욱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의 '맞음'에 대해 한번 더 숙고(熟考) 해 주었다면, 그리고 지금의 '틀림'을 한번 더 의심해 볼 수 있었다면 작은 바람에도 요동치는 갈대처럼 그렇게 줏대 없이 휘청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