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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AWRIKER Oct 28. 2020

익숙함으로부터의 탈피

어느 샐러리맨의 우울 #15.

"직장 내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조직문화 활성화를 위하여 전 임직원의 복장 자율화 시행을 아래와 같이 안내해 드리오니, 업무에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회사 게시판에 '복장 자율화' 실시를 알리는 글이 게재되었다.


사실 공고가 올라오기 훨씬 전부터 회사에서는 매주 금요일마다 정장이 아닌 편한 복장으로 출근하는 '넥타이 프리 데이' 제도가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놀라운 소식은 아니었다.


단지 복장 허용 수준에 대해서 만큼은 직원들의 뜨거운 관심과 기대가 집중되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넥타이 프리 데이'에서는 대외 이미지 및 회사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직복(職服) 기준을 근거로 여러 예외 조항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령 상의는 목 라인에 칼라가 붙어 있는 '단정한' 차림새여야 하고, 하의는 면바지 또는 '튀지 않는' 색 계열로 입어야 한다는 등 모호한 단어의 선택만큼이나 혼란만 가중된 또 다른 차원의 복장 규정이 새롭게 전파되어 있었다.




신입사원 시절에는 매일 아침 정장을 입고 출근하는 것이 꽤나 설레는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장에 넥타이까지 갖춰 입은 모습이 뭐랄까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이 어깨는 한껏 치솟아 있었고, 발걸음에도 힘이 넘쳤다.

출퇴근길에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게 되면 정장이라는 자신감을 무기로 당당함을 뽐내곤 했다.


물론 정장이 생활하기에 썩 편한 옷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지만...




정장은 통기성이 별로 좋지 않아 여름철에는 온몸이 땀으로 범벅되기 일쑤였다.

게다가 구김이 쉽게 가서 관리하기가 여간 까다로울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넥타이를 매고 업무를 하다 보면 혈액순환이 제대로 안되는지 오후 즈음되어서는 머리가 핑 도는 게 눈앞이 깜깜해지기도 했다.


이러한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근무 간 정장 착용은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고,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누구 하나 문제로 제기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다.




갑작스러운 '복장 자율화'가 이뤄진 건 정말이지 우연한 기회 때문이었다.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조직문화를 추구한다고 하면서 복장에 대해서 딱딱한 규정을 유지한다는 건 사고를 틀에 가두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신입사원 교육 수료식에 참석한 회장님은 한 사회초년생의 용기 있는 제안을 과감히 수용하였고, 일사천리로 전 임직원 복장의 '완전' 자율화가 시행되었다.




처음 '복장 자율화'에 대한 소식을 접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자율'이라는 단어에 대한 일종의 반감 같은 것이 생겼었다.

그동안 정장 착용이 너무 익숙해져서 '복장 자율화'라는 선심이 오히려 부담스러웠다는 게 그 이유라면 이유랄까.


십수 년 간 정장 만을 고수해 왔던 직원들은 제도가 시행되자 부랴부랴 자율복을 구매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자율복은 정장으로 익숙해진 편안함을 방해하는 귀찮은 '변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직 새로운 것만이 가치 있는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낡은 것이 꼭 진부 함이라는 악연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길들여져서 편해진 것을 마치 최선인 냥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또 다른 관점에서의 쇠퇴이자 몰락을 의미한다.


개선을 위한 충분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익숙함의 장막에 갇혀 그 시도조차 부정(否定)당한 수많은 제도의 존재는 변화를 경시한 나태함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익숙함은 때론 이성을 마비시키는 굴레다.




'복장 자율화'를 요구했던 패기 넘치는 신입직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회사로 이직을 했다고 한다.


혹자는 문제(?)만 일으켜놓고 정작 당사자는 쏙 빠졌다고 볼멘소리를 냈지만, '복장 자율화'만으로 오랜 기간 고착화된 이 회사의 시대착오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기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내린 결론은 아니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복장 자율화'가 시작된 지 어느덧 수일이 지났지만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조직 문화로 가는 길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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