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샐러리맨의 우울 #14.
로또 구매에 한창 열을 올리던 때가 있었다.
5천 원씩 매주 꼬박꼬박...
요일은 크게 상관이 없었지만, 매주 토요일 추첨 방송이 나오기 전까지는 늦지 않고 구매해 놓았다.
당첨될 수도 있는 기회를 한 주 잃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나는 종종 한 장의 로또를 구매하기 위해서 외출을 감행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만큼 로또는 현재의 불확실성에 마침표를 찍게 해 줄 오직 하나의 확실한 솔루션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로또에 당첨될 확률은 욕조에서 넘어져 죽을 80만 1,923분의 1 확률보다도 열 배 더 희박하고, 벼락에 맞아 죽을 428만 9,651분의 1 확률보다도 두 배 더 힘든 814만 5,060분의 1이라고 한다.
이것은 80킬로그램짜리 쌀 한 가마니에 있는 800만 개의 쌀알 중에서 눈을 감고 하나를 골랐을 때 검은 쌀알을 집어낼 확률과 마찬가지라고 하니...
참으로 인생을 짧은 순간 버라이어티 하게 바꿀 수 있는 방법에 어울리는 확률이라고 생각한다.
'로또만 되면 우선 빚을 갚을 거야. 좋은 집과 그럴싸한 차도 구입해야지. 부모님도 모른 척할 수는 없을 것 같고, 기부도 좀 해야 하나? 에이 됐고! 그전에 사고 싶었던 옷이랑 가방 정도는 먼저 사도 괜찮겠지?'
어쩌면 나는 로또를 통해 인생을 획기적으로 바꾸고 싶다는 생각보다 당첨되었을 때 밀려올 그 행복감이라는 환상에 빠지고 싶어서 그토록 로또 구매에 집착했던 건 아니었나 싶다.
비록 그것이 일주일도 채 유지되지 않을 한낱 가정(假定) 일뿐인 환상이라 해도 말이다.
환상에 대한 가성비를 따진다면 로또 추첨 방송이 끝난 직후, 딱 천 원만 투자해서 일찌감치 다음 회차 로또를 구매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면 가장 적은 돈을 투자해서 가장 오랫동안 환상을 유지할 수 있을 테니...
천 원을 투자하든 오천 원을 투자하든 아니면, 그 이상을 투자하든 814만 5,060분의 1이라는 초현실적 확률은 당첨에 대한 기대조차 비현실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로또 당첨금이 당장 회사를 때려치우고도 평생 놀고먹을 수 있을 정도로 차고 넘칠 수준은 아니지만, 적어도 직장 상사 앞에서 당당함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한 액수다.
봉급생활자 신분으로 직장에서 평생을 일한다 해도 쉽게 모을 수 없는 아니, 불가능한 규모의 돈을 일시에 지급받는다는 것은 단순한 경제적 가치 그 이상의 경쟁우위에 설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당첨금을 통해 확보된 강력한 경쟁지위는 수령인의 '배짱 게이지'를 두둑이 채워주기에 한치 부족함이 없다.
어쩌면 당신은 자존감의 높낮이가 돈이 많고 적음에 의해 좌우되는 속물근성을 향해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
진정한 행복이란 물질이 아닌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원론적인 내용을 근거로 지적하려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생리(生理) 앞에서 풍요로운 자들은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고, 부족한 자들은 너무나 무력할 따름이다.
그렇기에 로또라는 요행수에 목을 매는 수밖에는 딱히 방도가 없는 건지도 모른다.
순전히 운에 의해 결정되는 사건을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 그 운마저도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는 착각.
'로또'라는 이름의 환상은 바로 이런 통제력의 착각 속에서 태어나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무수히 많은 문제들에 대해 "로또만 되면... 할 텐데"라는 무책임한 말로 대충 얼버무린다.
나 역시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이 말 뒤에 숨어 실체 없는 해결책에 안도했던가.
주어지지도 않을 당첨금을 꿈꾸며 생각했던 결코 오지 않을 장밋빛 미래에 대하여...
요즘도 나는 이따금씩 로또를 산다.
내가 814만 5,060분의 1이라는 확률을 뚫고 로또에 당첨될 리 없겠지만
맨 정신으로 살아가기엔 너무도 냉혹하고 막막한 현실에 로또의 힘을 빌려 잠시 그렇게 환상의 나라로 도피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