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샐러리맨의 우울 #19.
"안녕하세요."
사무실로 들어서는 팀장에게 다가가 출근 인사를 건넨다.
지극히 형식적인 인사말이 오가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이 오늘 그와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라는 사실을...
나에 대한 그의 의도적인 '무시'가 시작된 지 벌써 수개월이 흘렀다.
이 악의적 행위의 시발점이 어디서부터 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단언컨대 내가 무의식 중에 그에게 보였던 행동이, 말투가, 태도가 아마도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던 건 아니었나 싶다.
하루에 한두 건, 간단하면서도 시시한 일들이 그로부터 전달된다.
말단 직원이 해도 됨직한 그런 사소한 일들을 처리하다 보면 회사에 몸담고 지내온 11년이라는 시간이 참 보잘것없이 느껴진다.
'제대로 된 일은 주지도 않고 허드렛일만 시키는 행위'
아마도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라는 법망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최소한의 적정선을 유지하며 잔머리를 굴리는 그의 교묘함이 엿보인다.
내가 주관하고 있는 업무 영역에서조차 나를 통하지 않고 다른 팀원에게 지시해 정작 업무 담당자인 나는 그러한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도록 하는 행위.
중요한 이슈에 대한 공유는 물론 팀 내 주요 업무에서 의도적으로 배제시켜 소속 팀에서 벌어지는 일조차 타 팀으로부터 전해 듣게 만드는 행위.
얼마 되지도 않는 팀원들과 근무하면서 자기 사람(?)이라 생각하는 몇몇 만을 대동해 팀장의 비호 아래 근무시간에도 카페에서 보란 듯이 시간을 보내는 행위.
1,2년 같이 일한 것도 아닌데 갑작스러운 그의 태도 전환이 무척이나 낯설고, 당황스러웠으며, 심지어 두렵기까지 했다.
어찌 되었든 팀장은 팀원에게 직, 간접적으로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였으니...
해외 법인장으로 근무하던 때도 그는 같은 수법(?)으로 구성원들을 자신에게 굴복시켰고, 끝까지 고개 숙이지 않던 직원들은 더욱 철저히 무시하고 배제시켜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번엔 내 차례가 된 것, 그뿐이었다.
영업팀 막내로 근무하던 시절, 팀장 눈 밖에 난 상사들이 빈 책상으로 내몰린 적이 있었다.
달랑 A4용지 1장과 볼펜만 제공하고는 하루 종일 한 일들에 대해 낱낱이 적으라는 가혹한 처벌을 받았는데, 당시 무거운 분위기에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지만, 조심스레 훔쳐본 그들의 얼굴에는 당혹감을 넘어 참혹함이 짙게 드리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모두는 회사를 떠났다.
아마도 그들에겐 '퇴사'라는 카드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무시(無試)'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존재 의의나 가치를 알아주지 아니함', '사람을 깔보거나 업신여김'이다.
팀장이 나에게 구사하는 '무(無) 가치함으로의 강요'는 그가 생각하는 가장 효율적인 '조련' 방법이었을지는 모르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의도적으로 타인의 가치를 폄하하는 행위는 어떠한 이유로든 용납될 수 없다.
과연 회사는 장(長)에게 납작 엎드리고, 바싹 움츠린 채로 그들 기분에 맞춰 놀아나야만 비로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인가?
'人而不知不溫 不亦君乎 (인이부지불온 불역군호)'
여기서 '부지(不知)'는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의미한다.
'온(溫)'은 단순한 '화(anger)'의 뜻을 넘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해석된다.
즉, '불온(不溫)'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까지 참아내는 것을 말한다.
"그 누구의 평가와 그 어떤 사람의 처신에도 연연하지 않고, 바르고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덕성과 교양을 겸비한 인격자를 어찌 '군자(君子)'라 부르지 않겠는가."
아무래도 나는 '군자'가 되기엔 글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