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시대
새로운 시대의 목자와 북방을 향한 복음
주께서 혼란의 시대에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세우신 목자, 로마의 감독 그레고리우스는 참으로 선한 목자였다. 그는 굶주리는 백성을 먹이고, 도시를 정비하며, 교회의 재산으로 가난한 자들을 돌보았다. 그는 또한 '목회 지침서'를 저술하여 교회의 지도자들이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쳤으니, 그의 가르침은 여러 세대에 걸쳐 서방 교회의 큰 빛이 되었다.
어느 날 그레고리우스가 로마의 시장을 지나다가, 노예로 팔려 온 앵그리족 소년들의 흰 피부와 금발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들은 앵그리족이 아니라 천사와 같도다. 어찌 저토록 환한 얼굴이 어둠의 권세 아래 있단 말인가" 하였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에 긍휼을 부어 주시니, 그는 주후 오백구십육 년에 수도사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마흔 명의 선교사를 브리타니아섬으로 파송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 일행은 두려워하였으나 그레고리우스의 격려에 힘입어 켄트 왕국에 이르렀다. 당시 켄트의 왕 에델버트는 프랑크 왕국의 그리스도인 공주 베르타와 혼인한 자였다. 주께서 왕의 마음을 여시니, 그가 선교사들을 영접하고 그들의 설교를 듣고는 마침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왕을 따라 수많은 백성이 주께로 돌아왔으니, 이는 브리타니아 땅에 임한 하나님의 큰 권능이었다.
하나의 섬, 하나의 신앙
그때에 브리타니아 북부와 아일랜드에는 이미 켈트 수도사들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어 있었다. 이들은 로마 교회와 부활절을 지키는 날짜와 성직자의 머리 깎는 방식이 달랐다. 이로 인해 두 선교 전통 사이에 갈등이 생기자, 노섬브리아의 왕 오스위가 주후 육백육십사 년에 휘트비에서 회의를 소집하였다. 양측의 주장을 들은 왕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로마의 전통을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잉글랜드의 교회는 로마 교회와 하나가 되어 보편 교회의 일원으로서 든든히 서게 되었다.
남쪽에서 불어온 시련의 바람
교회가 이처럼 북방의 땅끝으로 나아갈 때, 남쪽 아라비아 사막에서는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칼을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따라 성지를 정복하고 예루살렘과 안디옥, 알렉산드리아와 같이 유서 깊은 교회의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터툴리아누스와 키프리아누스, 그리고 위대한 아우구스티누스를 배출했던 북아프리카의 교회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칼에 죽거나 이슬람의 지배 아래 들어가 신앙의 자유를 잃고 고통받았다.
이슬람의 군대는 바다를 건너 히스파니아까지 정복하고 프랑크 왕국을 넘보았다. 이에 프랑크 왕국의 궁재였던 카롤루스 마르텔이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주후 칠백삼십이 년에 투르에서 이슬람 군대와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서유럽은 이슬람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졌으니, 이 또한 교회를 보존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음이다.
게르마니아의 도끼와 십자가
잉글랜드 교회가 굳건히 서자, 주께서는 이제 그들을 사용하여 유럽 대륙의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윈프리드라 불리는 앵글로색슨 수도사가 있었는데, 그는 훗날 보니파티우스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게르만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고 라인강을 건너게 되었다.
당시 게르만족은 토르 신의 신성한 떡갈나무를 숭배하고 있었다. 보니파티우스는 수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담대히 그 나무를 도끼로 찍어 쓰러뜨렸다. 사람들은 그가 신의 저주를 받아 즉시 죽을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보니파티우스는 쓰러진 나무를 가리키며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고, 그 나무로 예배당을 지었다. 많은 게르만족이 우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왔으니, 그는 참으로 '게르만족의 사도'라 불릴 만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프리슬란트에서 이교도들의 습격을 받아 순교의 관을 썼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서방 교회가 이교도와 싸우는 동안, 동방의 비잔틴 제국에서는 형제들 사이에 큰 다툼이 일어났으니, 바로 성화상 논쟁이었다. 레오 3세 황제가 우상 숭배를 금한다는 이유로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그림과 조각상을 모두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교회는 성화상을 지키려는 자들과 파괴하려는 자들로 나뉘어 백 년 넘게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이때 다마스쿠스에 살던 수도사 요한네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형상으로 만들 수 없으나, 스스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아들 하나님은 그 형상을 그릴 수 있다”고 가르치며 성화상을 변호하였다. 마침내 주후 칠백팔십칠 년, 두 번째 니케아 공의회가 열려 성화상에 절하며 공경하는 것은 가능하나,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예배와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이로써 교회는 성육신의 신비를 지키고 오랜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새로운 로마, 새로운 황제
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는 위대한 군주였다. 그는 흩어진 서유럽을 통일하고, 학문을 장려하며, 교회를 보호하였다. 주후 팔백 년 성탄절에, 카롤루스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로마의 감독 레오 3세가 갑자기 그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 주며 그를 '로마인의 황제'로 선포하였다. 성당에 모인 모든 백성이 환호하며 “위대하고 평화를 주시는 황제 카롤루스 마그누스 만세!”라고 외쳤다.
이는 옛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지 삼백여 년 만에, 로마 교회와 게르만족의 왕이 손을 잡고 서방에 새로운 기독교 제국이 탄생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로써 교회는 새로운 보호자를 얻고, 유럽은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혼돈 속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주님의 역사는 참으로 오묘하였다.
참고 문헌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y the Great), 『서신집』(Registrum Epistolarum), 『목회 지침서』(Liber Regulae Pastoralis) 그레고리우스가 직접 기록한 편지들은 당시 로마의 상황과 그의 목회적, 행정적 활동을 보여주는 1차 사료이며, 특히 앵글로색슨족 선교를 지시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목회 지침서』는 그의 목회 철학을 보여주는 핵심 저작입니다.
베다 베네라빌리스(Bede the Venerable), 『잉글랜드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 본 장의 전반부, 즉 그레고리우스의 앵글로색슨 선교 파송, 아우구스티누스의 켄트 왕국 선교, 그리고 켈트 선교 전통과 로마 선교 전통이 만난 휘트비 회의에 대한 가장 중요하고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사료입니다.
『보니파티우스 서신집』(The Letters of Boniface) 및 『빌리발트의 보니파티우스전』(Willibald's Life of Boniface) 게르만족의 사도' 보니파티우스의 선교 전략과 활동을 그의 편지를 통해 직접 확인할 수 있으며, 그의 제자 빌리발트가 쓴 전기는 그가 토르의 떡갈나무를 쓰러뜨린 사건을 비롯한 주요 행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John of Damascus), 『성스러운 형상에 관하여』(On the Divine Images)
성화상 파괴론에 맞서 성화상의 신학적 정당성을 변호한 핵심적인 저술로, 성육신 교리에 기반한 그의 논리가 제2차 니케아 공의회 결정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아인하르트(Einhard), 『카롤루스 대제 전기』(Vita Karoli Magni) 카롤루스 대제의 궁정 학자였던 아인하르트가 직접 저술한 전기. 특히 주후 800년 로마에서 열린 그의 황제 대관식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핵심 사료입니다.
유스토 L. 곤잘레스(Justo L. González), 『중세교회사』(The Story of Christianity, Vol. 1, Part II)
그레고리우스 대교황부터 카롤루스 대제의 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교황권, 수도원 운동, 이슬람의 발흥, 그리고 프랑크 왕국과의 관계 등 본문에 기술된 전반적인 역사적 흐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자료입니다.
피터 브라운(Peter Brown), 『서구 기독교 세계의 형성』(The Rise of Western Christendom) 고대 후기에서 중세 초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복잡한 사회, 문화, 종교적 변화를 깊이 있게 분석한 연구서로, 본문에 기술된 시대의 거시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