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3장

성장시대

by 박루이


새로운 제국과 말씀의 씨앗

주께서 카롤루스 대제를 통해 서방에 세우신 새로운 로마 제국은 교회의 큰 울타리가 되었다. 황제는 단지 칼로만 다스리지 않고, 주의 말씀을 아는 것이 백성을 위하는 길이라 믿었다. 그는 잉글랜드의 학자 알쿠이누스를 비롯한 여러 학자를 궁정으로 불러 모아, 성경을 올바로 필사하게 하고, 모든 교구에 학교를 세워 성직자들을 교육하게 하였다. 이로써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학문과 신앙의 부흥이 일어나니, 사람들은 이를 '카롤링거 르네상스'라 불렀다. 말씀이 바로 서자 교회의 질서가 잡히고, 백성들의 신앙도 자라나기 시작하였다.


시련의 세 물결

그러나 카롤루스 대제가 주님 품으로 돌아간 후,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이 제국을 나누어 가지며 서로 다투니 나라는 다시 큰 혼란에 빠졌다. 주께서는 당신의 교회가 세상의 권세에만 의지하지 않도록 새로운 시련을 허락하셨다. 북쪽 바다에서는 용 모양의 배를 탄 바이킹들이 교회를 불사르고 수도원을 약탈하였으며, 동쪽 초원에서는 마자르족 기병들이 말을 타고 들어와 백성들을 노예로 끌고 갔다. 또한 남쪽 바다에서는 사라센 해적들이 이탈리아 해안을 노략질하니, 유럽은 다시 공포와 절망의 어둠에 잠기는 듯하였다. 수도사들은 기도서를 들고 피난길에 올랐고, 백성들은 "주여, 북방의 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얼음 땅에 뿌려진 복음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주께서는 복음의 빛을 비추어 주셨다. 성령께서 안스가르라는 용감한 수도사의 마음에 감동을 주사, 그는 해적들의 고향인 덴마크와 스웨덴으로 건너가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여러 번 쫓겨나고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십자가를 전하며 교회를 세웠다. 비록 그의 생전에 큰 열매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가 뿌린 씨앗은 자라나 훗날 덴마크의 왕 하랄드 블라토와 노르웨이의 왕 올라프 트뤼그바손과 같은 강력한 왕들이 세례를 받게 하였고, 마침내 북방의 바이킹족 전체가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게 되었다. 이로써 사람을 죽이던 그들의 칼은 십자가를 지키는 칼이 되었으니, 이는 사나운 늑대를 온순한 양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셨다.


슬라브족을 위한 글자

같은 시기, 동방의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슬라브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라는 두 형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그들은 모라비아 땅에 이르러, 슬라브 사람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된 성경과 예배서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에 그들은 밤낮으로 기도하며 슬라브 말을 위한 새로운 글자를 만들고, 복음서와 시편, 그리고 예배에 필요한 책들을 그들의 말로 번역하였다.

어떤 이들이 라틴어나 그리스어로만 예배해야 한다고 비방하였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민족의 언어로 전해져야 마땅하다"고 담대히 맞섰다. 그들의 헌신을 통해 복음은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로 퍼져나갔고, 마침내 주후 구백팔십팔 년에는 키예프 루스의 블라디미르 대공이 드네프르강에서 온 백성과 함께 세례를 받으니, 광대한 러시아 땅이 주님께 돌아오는 문이 열렸다.


슬픈 분열

교회가 이처럼 북쪽과 동쪽으로 힘차게 뻗어 나갈 때, 안타깝게도 오랫동안 교회의 두 기둥이었던 로마의 서방 교회와 콘스탄티노플의 동방 교회 사이의 갈등은 점점 깊어져 갔다. 두 교회는 예배 방식과 신학적 표현에서 오랫동안 다른 길을 걸어왔는데, 특히 서방 교회가 니케아 신경의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고"라는 구절에 "성자에게서도"라는 말을 덧붙이자 갈등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마침내 주후 천오십사 년, 로마 교황의 사절이었던 훔베르투스 추기경이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여, 동방 교회의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와 격렬한 논쟁 끝에 서로를 파문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써 천 년 동안 하나였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라틴어를 쓰는 서방 가톨릭교회와 그리스어를 쓰는 동방 정교회로 나뉘게 되었으니, 이는 하늘의 천사들도 슬퍼할 일이었다.


클뤼니의 개혁

교회가 분열의 아픔을 겪고, 바이킹의 침략으로 혼란해진 서방 교회는 심각한 타락에 빠져들었다. 주교와 수도원장 자리가 귀족들에게 팔려나가고, 성직자들은 결혼하여 세속적인 삶을 살았다. 특히 교황의 자리마저 로마 귀족 가문들의 권력 다툼의 노리개가 되어 심히 더럽혀졌다.

주께서는 이 어둠을 보시고, 프랑스 클뤼니라는 작은 마을에서 새로운 개혁의 불씨를 일으키셨다. 주후 구백십 년에 세워진 클뤼니 수도원은 세속 영주의 간섭을 받지 않고 오직 교황에게만 순종하며, 베네딕투스의 규칙을 엄격히 따라 기도와 노동에만 전념하였다. 그들의 거룩한 삶의 소문이 퍼져나가자,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수도원이 클뤼니의 개혁에 동참하였다. 이 운동은 부패한 성직자들을 몰아내고, 성직매매를 금하며, 교회의 영적 권위를 되찾으려는 거대한 물결이 되었다. 이 개혁의 정신은 마침내 로마에까지 이르러,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찬 교황들을 세우는 기초가 되었다.




참고 문헌

림베르트(Rimbert), 『안스가르의 생애』(Vita Ansgari) 안스가르의 제자이자 후계자인 림베르트가 기록한 전기. '북방의 사도' 안스가르의 덴마크와 스웨덴 선교 활동, 그의 고난과 신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1차 사료입니다.

『러시아 원초 연대기』(The Russian Primary Chronicle) 키예프 루스의 초기 역사를 담은 연대기. 특히 블라디미르 대공이 여러 종교를 비교한 후, 콘스탄티노플의 아름다운 예배에 감동하여 정교회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백성들과 함께 세례를 받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슬라브 사도들의 생애』(Vita Constantini and Vita Methodii) 키릴루스(콘스탄티누스)와 메토디우스의 제자들이 기록한 전기. 슬라브 문자를 창제하고 성경과 예배서를 번역하여 슬라브 민족을 복음화한 두 선교사의 사역을 상세히 전해주는 핵심 자료입니다.

훔베르투스 추기경(Cardinal Humbert), 『파문 교서』(Bull of Excommunication, 1054) 1054년 대분열 당시, 교황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파문하며 성 소피아 대성당 제단에 놓고 온 문서. 필리오케 문제 등 동방 교회를 비판하는 서방 교회의 입장을 담고 있습니다.

『클뤼니 수도원 설립 헌장』(Foundation Charter of Cluny, 910) 아키텐의 공작 기욤이 클뤼니 수도원을 세우며 기증한 문서. 이 헌장은 수도원을 세속 영주와 주교의 관할에서 벗어나 오직 교황의 권위 아래 둠으로써, 이후 클뤼니 개혁 운동의 독립성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유스토 L. 곤잘레스(Justo L. González), 『중세교회사』(The Story of Christianity, Vol. 1, Part II) 카롤링거 르네상스부터 11세기 교황 개혁 운동까지의 흐름을 다루며, 바이킹과 슬라브족의 개종, 1054년의 대분열, 클뤼니 개혁 운동의 배경과 의미를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R. W. 서던(R. W. Southern), 『중세의 형성』(The Making of the Middle Ages) 이 시기 유럽 사회의 변화, 특히 바이킹의 침략이 가져온 영향과 클뤼니 개혁 운동이 서유럽의 정신과 구조를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깊이 있게 분석한 명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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