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시대
교회와 세상의 검
클뤼니 수도원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개혁의 불꽃은 마침내 로마에 이르러, 힐데브란트라는 이름의 수도사를 교회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리니, 그가 바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였다. 그는 교회가 세속 군주의 발아래 놓여 신음하는 것을 보고 통탄하며,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시요, 그분의 대리자인 교황이 세상의 황제보다 위에 있다”고 선포하였다. 그는 성직매매와 사제의 혼인을 엄금하고, 세속 군주가 주교를 임명하는 관행을 뿌리 뽑으려 하였다.
이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크게 노하여 교황을 폐위하려 하니, 교황은 도리어 황제를 파문하여 그의 권위를 무너뜨렸다. 황제의 발아래 있던 제후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자, 다급해진 하인리히는 주후 천칠십칠 년 겨울에 알프스 산맥을 넘어 교황이 머물던 카노사 성으로 향했다. 그는 맨발로 눈밭 위에 서서 사흘 동안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였으니, 마침내 교황은 그를 용서하였다. 이 사건은 땅의 권세가 하늘의 권세 앞에 무릎 꿇은 상징이 되었고, 교회의 권위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지는 시대의 서막이 되었다.
십자가를 든 군대
이 무렵, 동방에서 일어난 셀주크 튀르크족이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 순례자들을 박해하였다. 동로마 황제가 서방 교회에 다급히 도움을 요청하자, 주후 천구십오 년에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에서 공의회를 열었다. 그는 수많은 기사와 제후들 앞에서 “형제들끼리 싸우는 칼을 내려놓고, 동방의 형제들을 도우며 이교도의 손에서 그리스도의 무덤을 되찾으라! 이는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외쳤다.
성령의 불이 군중 가운데 임하니,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고 화답하며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를 그렸다. 이로써 십자군이라 불리는 거대한 군대가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들은 수많은 고난 끝에 마침내 주후 천구십구 년에 예루살렘 성벽을 넘어 성지를 탈환하였다. 그러나 거룩한 명분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여러 차례 계속되면서 점차 세속의 욕심으로 더러워졌다. 급기야 제4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이 아닌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가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약탈하고 죽이는 참혹한 죄를 저지르기도 하였으니, 인간의 열심이 하나님의 뜻을 앞설 때 얼마나 큰 비극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세상을 섬기는 새로운 군사들
교회의 권세가 높아지고 부가 쌓여갈 때, 어떤 이들은 다시 초대교회의 가난을 사모하며 새로운 길을 걸어갔다. 시토 수도회를 세운 이들은 화려해진 클뤼니를 떠나 황무지로 들어가 엄격한 노동과 기도의 삶을 살았으니, 그 중심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가 있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설교가요 신학자였으며, 그의 거룩한 삶은 교황과 황제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또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라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작은 형제회’를 세웠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수도원에 머물지 않고, 새로 생겨난 도시의 거리로 나아가 맨발로 복음을 전하며, 나병 환자들을 돌보고 자연 만물을 형제라 부르며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같은 시기, 스페인의 도미니쿠스는 이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지한 자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고 ‘설교자회’를 세웠다. 그의 제자들은 파리 대학과 같은 학문의 중심지로 나아가, 깊이 있는 연구와 논리적인 설교로 진리를 변호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이성과 신앙의 집
이 시대에 교회는 위대한 학문적 성장을 이루었다. 유럽 곳곳에 대학이라는 새로운 배움의 터가 생겨났고, 그곳에서 스콜라 신학이라 불리는 학문이 꽃을 피웠다. 이는 신앙의 진리를 인간의 이성으로 깊이 탐구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 덕분이었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는 ‘나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고 말하며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하였고, 파리의 아벨라르두스는 날카로운 변증법으로 신학의 난제들을 탐구하였다.
이 학문의 정점에 도미니코회 수사였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여 기독교 신학과 종합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그가 저술한 '신학대전'은 하나님의 존재부터 구원의 신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학적 질문에 답하려는 거대한 시도였으며, 후대 가톨릭 신학의 가장 튼튼한 기둥이 되었다.
교황권의 정점과 그 그림자
주후 천백구십팔 년에 교황의 자리에 오른 인노첸티우스 3세는 역대 가장 강력한 권세를 누렸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라 칭하며 “교황은 해와 같고 황제는 달과 같아서, 달이 해에게서 빛을 받듯 황제는 교황에게서 권위를 받는다”고 선포하였다. 그는 유럽의 왕들을 마음대로 폐위시키거나 세웠으며, 주후 천이백십오 년에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소집하여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교리로 확정하는 등 교회의 모든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때가 바로 교황권의 가장 높은 정점이었다.
그러나 권세는 교만을 낳는 법이었다. 주후 천이백구십사 년에 교황이 된 보니파티우스 8세는 프랑스의 왕 필리프 4세가 교회의 재산에 세금을 부과하려 하자 크게 격노하였다. 그는 '우남 상탐'이라는 교서를 반포하여 “구원을 받으려면 모든 인간은 로마 교황에게 복종해야만 한다”고 선언하며 교황의 절대 권력을 주장하였다.
이에 분노한 필리프 왕은 군대를 보내 이탈리아 아나니에서 휴가 중이던 늙은 교황을 습격하여 그의 뺨을 때리고 감금하였다. 이 충격으로 교황은 얼마 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는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교황이 세속의 모든 군주 위에 군림하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교회의 전성시대는 그 스스로의 교만으로 인해 저물기 시작하고 있었다.
참고 문헌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y VII), 『서신집』(Registrum), 『교황 훈령』(Dictatus Papae) 교황이 직접 기록한 편지들은 하인리히 4세와의 투쟁 과정을 생생히 보여주며, 『교황 훈령』은 교황의 절대적 수위권을 주장하는 그의 개혁 사상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핵심 문헌입니다.
클레르몽 공의회에 대한 기록들 (e.g., Fulcher of Chartres, Gesta Francorum Iherusalem peregrinantium) 십자군에 직접 참여했던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 특히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클레르몽 연설과 제1차 십자군의 여정, 그리고 예루살렘 점령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Bernard of Clairvaux), 『설교집』(Sermons on the Song of Songs) 시토 수도회의 영성과 신비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그의 설교집은 12세기 교회의 영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입니다.
『성 프란체스코의 잔꽃송이』(Fioretti di San Francesco), 토마스 첼라노의 『프란체스코 전기』(Life of St. Francis) 프란체스코의 삶과 가르침, 기적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전기 문헌들로, 초대 프란체스코회의 정신과 활동을 보여줍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신학대전』(Summa Theologica) 스콜라 신학의 정수를 담은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켜 기독교 진리를 체계화하려는 중세 지성사의 가장 위대한 산물입니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Fourth Lateran Council, 1215), 『교령집』(Canons) 교황 인노첸티우스 3세의 주재로 열린 중세 최대 공의회의 결정 사항들. 화체설, 이단 규정, 성직자 개혁 등 당시 교회의 모든 면을 망라하는 중요한 기록입니다.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Boniface VIII), 『우남 상탐』(Unam Sanctam, 1302) 교황의 영적, 세속적 권위가 절대적임을 주장한 가장 강력한 교황 교서로, 중세 교황권의 정점을 찍은 동시에 몰락의 원인이 된 역사적 문서입니다.
R. W. 서던(R. W. Southern), 『중세의 형성』(The Making of the Middle Ages) 및 콜린 모리스(Colin Morris), 『교황제 군주국가』(The Papal Monarchy: The Western Church from 1050 to 1250) 이 시기 교황권의 성장, 십자군 운동, 수도원 개혁, 그리고 대학의 발흥 등 '전성시대'의 다양한 측면을 깊이 있게 분석한 현대의 대표적인 연구서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