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퇴시대
아나니의 뺨, 그리고 시작된 쇠퇴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가 아나니에서 프랑스 왕의 신하에게 뺨을 맞고 수치 속에서 죽으니, 이는 교회의 머리가 세상 군주에게 굴복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로써 교황의 권세가 해와 같고 황제의 권세는 달과 같다던 시대는 막을 내리고, 교회는 길고 긴 쇠퇴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바벨론의 그림자
프랑스 왕의 힘이 강성해지자, 로마의 교황들은 로마를 떠나 프랑스 아비뇽에 머물게 되었으니, 주후 천삼백구 년부터 칠십여 년간 이어진 이 시기를 사람들은 '교회의 바빌론 유수'라 불렀습니다. 교황청은 프랑스 왕의 노리개가 되었고, 사치와 방탕, 그리고 온갖 세금으로 원성이 자자하였다. 베드로의 후계자가 마땅히 있어야 할 로마의 자리는 비어 있었고, 교회의 영적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마침내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같은 거룩한 여인들의 간청에 못 이겨 로마로 돌아왔으나, 그가 죽자 더 큰 혼란이 교회를 덮쳤다. 로마 시민들의 위협 속에 이탈리아인 교황이 선출되자, 이에 불복한 프랑스 추기경들은 아비뇽으로 돌아가 자기들만의 교황을 또 세웠다. 이로써 교회는 두 명의 교황을 갖게 되었으니, 로마의 교황과 아비뇽의 교황은 서로가 정통이라 주장하며 상대방과 그를 따르는 모든 이들을 파문하였다. 온 유럽은 어느 교황을 따라야 할지 몰라 갈피를 잡지 못했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머리가 둘로 나뉜 괴물처럼 되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이 대분열의 비극은 사십 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죽음의 그림자와 개혁의 새벽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후 천삼백사십칠 년에 흑사병이라는 무서운 재앙이 온 유럽을 휩쓸었다. 인구의 삼분의 일이 넘는 사람들이 검은 반점이 돋아나며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사람들은 이를 하나님의 진노라 여기며 두려움에 떨었고, 교회는 이 재앙 앞에서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하였다.
이러한 총체적인 위기 속에서, 주께서는 어둠을 밝힐 새벽별과 같은 인물들을 일으키셨다. 잉글랜드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자 존 위클리프는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시며, 신앙의 유일한 권위는 성경에 있다"고 담대히 외쳤다. 그는 부패한 교회의 재산을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모든 사람이 자기 말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위대한 사업을 이끌었다.
그의 가르침은 바다를 건너 보헤미아 땅에 이르러, 프라하의 신부 얀 후스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후스는 면죄부 판매와 성직자들의 타락을 강하게 비판하며 백성들의 큰 지지를 얻었다. 그는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소집된 콘스탄츠 공의회에 황제가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믿고 출두하였다. 그러나 공의회는 약속을 어기고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주후 천사백십오 년에 화형대에 세웠다. 그는 불길 속에서도 "나는 진리를 위하여 기꺼이 죽노라"고 외치며 순교하니, 그의 죽음은 훗날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될 거대한 불씨가 되었다.
옛 샘으로 돌아가려는 노력
이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라 불리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과 예술을 다시 발견하여 인간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찬양하려는 운동이었다.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이 정신은 기독교 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중세 스콜라 신학의 복잡한 논쟁을 넘어, 초대 교부들의 저술과 성경 원전으로 돌아가고자 주장하였다.
그 선두에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라는 위대한 인문학자가 있었다. 그는 교회의 미신과 성직자들의 무지를 신랄하게 풍자하는 글을 썼으며, 무엇보다 주후 천오백십육 년에 최초로 신약성경의 그리스어 원전을 출판하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다. 이로써 학자들은 천 년 동안 사용된 라틴어 번역본 불가타의 오류를 발견하고, 사도들이 기록한 원래의 말씀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열게 되었다.
스스로를 살 찌운 목자들과 마지막 불꽃
그러나 교회의 머리인 교황들은 시대의 아픔과 개혁의 열망에 귀를 닫았다. 그들은 영적인 목자이기보다는 세속의 군주처럼 행세하며, 전쟁을 일삼고 자기 가문의 배를 불리는 데에만 몰두하였다. 특히 알렉산데르 6세와 같은 교황의 타락은 극에 달했다.
주후 천오백육 년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을 새로 짓기 시작하였고, 그의 뒤를 이은 레오 10세는 공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독일에 특별 면죄부를 판매하도록 허락하였다. 도미니코회 수도사 요한 테첼은 "동전이 헌금함에 쨍그랑하고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 있던 영혼은 천국으로 튀어 오른다"는 황당한 구호를 외치며 면죄부를 팔았다.
하나님의 은혜가 돈으로 거래되는 이 기막힌 현실에,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서학 교수였던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분연히 일어섰다. 그는 오랫동안 죄의 문제로 고뇌하다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로마서의 말씀 속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은 자였다. 주후 천오백십칠 년 시월 삼십일일, 그는 면죄부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아흔다섯 개의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정문에 내걸었다. 이는 본래 학문적인 토론을 위한 것이었으나, 성령께서는 이 망치 소리를 온 유럽을 뒤흔드는 거대한 종소리로 바꾸셨으니, 이로써 교회의 가장 깊은 밤은 지나고 거대한 개혁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참고 문헌
장 프루아사르(Jean Froissart), 『연대기』(Chronicles) 14세기 유럽의 전쟁과 사회상을 생생하게 기록한 연대기. 특히 아비뇽 유수와 흑사병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콘스탄츠 공의회 회의록』(Acts of the Council of Constance) 교황들의 폐위와 선출을 통해 대분열을 종식시킨 공의회의 공식 기록. 특히 얀 후스를 심문하고 정죄하는 과정이 상세히 담겨 있습니다.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성경의 진리에 관하여』(On the Truth of Holy Scripture), 『권세에 관하여』(On Dominion) 교황의 권위에 맞서 성경의 최종 권위를 주장하고, 부패한 교회의 재산 문제를 비판한 그의 핵심 저작들입니다.
얀 후스(Jan Hus), 『교회에 관하여』(De Ecclesia), 『콘스탄츠에서 보낸 편지들』(Letters from Constance)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교회의 본질과 교황의 권위에 대해 논한 그의 저서와, 순교 직전까지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며 동료들에게 보낸 편지들은 그의 사상과 신앙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우신예찬』(Praise of Folly), 『신약성경 그리스어 대조본』(Novum Instrumentum omne) 『우신예찬』은 당대 교회의 부패와 미신을 풍자적으로 비판한 작품이며, 그가 편집한 그리스어 신약성경은 종교개혁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인문주의의 가장 중요한 성과물입니다.
바르바라 터크먼(Barbara W. Tuchman), 『먼 거울: 재앙의 14세기』(A Distant Mirror: The Calamitous 14th Century) 흑사병, 백년전쟁, 교회의 대분열 등 14세기의 총체적 위기를 생생하게 재구성한 현대 역사서의 고전입니다.
유스토 L. 곤잘레스(Justo L. González), 『종교개혁사』(The Story of Christianity, Vol. 2: The Reformation to the Present Day)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배경이 된 14-15세기의 교회의 타락, 개혁 운동들, 그리고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영향을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헤이코 A. 오버만(Heiko A. Oberman), 『루터: 하나님과 악마 사이의 인간』(Luther: Man between God and the Devil) 중세 후기의 영성과 신학적 분위기가 어떻게 루터라는 인물을 형성했으며, 그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 배경을 깊이 있게 분석한 연구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