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시대
한 수도사의 외침과 무너진 세계
주후 천오백이십일 년, 독일 보름스에 소집된 제국 의회에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섰다. 그의 앞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젊은 황제 카롤루스 5세와 제국의 모든 제후, 그리고 교황의 사절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루터가 쓴 책들을 가리키며 그의 주장을 철회하라고 명령하였다. 온 세상의 권세가 그를 짓누르는 순간, 루터는 잠시 기도한 후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성경의 증거나 명백한 이성에 의해 나의 오류가 증명되지 않는 한,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으며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 양심에 거슬러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올바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기 섰나이다. 나는 달리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이 한 사람의 외침은 교황과 황제가 지배하던 천 년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거대한 지진의 시작이었다. 루터는 그의 뜻을 지지한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 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 신약성경을 독일 민중의 언어로 번역하는 위대한 사역을 이루었다. 이제껏 사제들의 전유물이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인쇄술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타고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가니, 수많은 사람이 복음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교회의 개혁을 지지하게 되었다.
여러 갈래로 터져 나온 개혁의 강물
루터가 일으킨 개혁의 불길은 여러 갈래로 퍼져나갔다. 스위스 취리히에서는 울리히 츠빙글리가 독자적으로 성경에 근거한 개혁을 이끌었다. 그는 성찬을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상징으로 보았으나,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믿었던 루터와는 합의에 이르지 못하니, 이는 개혁 진영의 첫 번째 분열이 되었다.
프랑스 출신의 법학도 장 칼뱅은 박해를 피해 스위스 제네바로 건너가, 그곳을 개혁 신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는 '기독교강요'라는 위대한 저술을 통해 개혁 신앙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는데,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예정, 그리고 장로와 집사를 통해 교회를 다스리는 제도를 강조하였다. 그의 가르침은 프랑스의 위그노, 네덜란드의 개혁교회,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특히 제네바에서 칼뱅의 가르침을 받은 존 녹스는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굳센 믿음으로 여왕 메리와 맞서며 장로교회를 스코틀랜드의 국교로 세웠다.
한편, 어떤 이들은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신앙을 고백한 성인들만이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믿으며 ‘재세례파’라 불렸다. 그들은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주장하며 평화주의를 따랐으나,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 모두에게 이단으로 몰려 혹독한 박해를 받고 수없이 많은 순교의 피를 흘렸다.
왕의 의지로 시작된 영국의 길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교리 논쟁이 아닌 왕의 혼인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헨리 8세 왕은 아들을 낳지 못하는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고 궁녀 앤 불린과 결혼하려 하였으나, 교황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헨리 8세는 주후 천오백삼십사 년에 수장령을 반포하여 교황과의 관계를 끊고, 스스로 잉글랜드 교회의 머리가 되었다.
헨리 8세 치하의 잉글랜드 교회는 교리적으로는 여전히 가톨릭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 때에 토머스 크랜머와 같은 개혁가들의 주도로 교회가 급격히 개신교화되었고, '공동기도서'가 만들어졌다. 그 뒤를 이은 메리 여왕이 가톨릭으로 복귀하려 하며 수많은 개신교도를 화형에 처해 '피의 메리'라 불렸으나, 그녀가 죽고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이 되자 잉글랜드 교회는 가톨릭 전통과 개신교 교리 사이의 중도 노선을 확립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반격에 나선 로마
분열과 혼란 속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도 스스로를 개혁하고, 개신교의 도전에 맞서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의 귀족 출신 군인이었던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회심한 후, ‘예수회’라는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예수회 회원들은 교황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높은 수준의 교육과 열정적인 해외 선교를 통해 개신교가 퍼져나간 지역을 다시 가톨릭 신앙으로 되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가톨릭교회는 주후 천오백사십오 년부터 트렌토에서 오랜 기간 공의회를 열어, 개신교의 주장을 반박하고 가톨릭의 교리를 명확히 하였다. 공의회는 성경뿐만 아니라 교회의 전통 역시 신앙의 권위임을 재확인하고, 구원은 믿음만으로가 아니라 선행을 동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일곱 성사와 화체설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성직자들의 부패를 막기 위한 여러 개혁안을 결의하였다.
피로 물든 백 년
신앙의 차이는 결국 피를 부르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프랑스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도 사이에 삼십 년이 넘는 내전이 벌어졌고, 특히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수만 명의 위그노가 학살당하는 참극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결국 유럽 대륙 전체가 주후 천육백십팔 년부터 삼십 년 동안 '30년 전쟁'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독일 땅에서 시작된 이 전쟁은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야망이 뒤엉켜 온 유럽을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전쟁과 기근, 역병으로 죽어갔다.
마침내 주후 천육백사십팔 년, 기나긴 전쟁에 지친 각국의 대표들이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각 지역의 군주가 자신의 영토의 종교를 결정할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사실상 하나의 통일된 기독교 세계가 끝났음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한때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하나였던 서방 교회는 이제 서로 다른 신앙을 고백하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으니, 이는 교회의 개혁을 위해 치른 너무나도 값비싸고 슬픈 대가였다.
참고 문헌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보름스 의회 연설 기록』(Speech at the Diet of Worms, 1521),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 1520) 보름스 의회에서의 연설은 종교개혁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며, 그의 저술들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고 '만인사제설'과 같은 핵심 개혁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장 칼뱅(John Calvin),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개신교 교리를 가장 체계적이고 포괄적으로 정리한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이후 수 세대에 걸쳐 개혁주의 신학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 1549, 1552)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신학과 영성을 담고 있는 예배서로, 아름다운 문체와 균형 잡힌 신학을 통해 성공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tius of Loyola),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 예수회의 영성의 기초가 되는 저작으로, 체계적인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도록 이끄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트렌토 공의회 교령 및 교리집』(Decrees and Canons of the Council of Trent, 1545-1563) 종교개혁에 대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답변. 가톨릭의 핵심 교리를 재확인하고, 교회법을 개혁하여 이후 수백 년간 가톨릭교회의 방향을 결정한 가장 중요한 문서입니다.
롤런드 베인턴(Roland H. Bainton), 『마르틴 루터의 생애』(Here I Stand: A Life of Martin Luther) 루터의 생애와 사상을 생생하고 깊이 있게 그려낸 현대의 대표적인 전기입니다.
디어메이드 맥클록(Diarmaid MacCulloch), 『종교개혁사』(The Reformation: A History) 루터교, 개혁교회, 급진 종교개혁, 그리고 가톨릭 종교개혁을 모두 아우르며, 이 시대의 복잡한 정치, 사회, 신학적 변화를 포괄적으로 분석한 기념비적인 연구서입니다.
C. V. 웨지우드(C. V. Wedgwood), 『30년 전쟁』(The Thirty Years War) 종교개혁 시대의 비극적인 종결점인 30년 전쟁의 원인과 전개, 그리고 그 참상을 상세하게 서술한 고전적인 역사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