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은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만난 기간이 오래된 만큼 우정의 크기도 비례할 거라 여기던 때가 있었다. 중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낯선 동네로 이사하여 나만 홀로 어느 여고에 배정받았을 때, 대학 진학 시 전국의 학생들이 모였을 때, 입사했을 때 등. 이전 소속의 사람들을 만나 “너희들과 함께여서 다행이야, 지금은 너무 외로워.”라고 외쳤고 다행히 그들은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오래된 친구들 덕에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어려운 일에 봉착했을 때 찾는 귀한 보험과 같았다. 그러니 새로운 터전에서 만날 사람들에 대한 탐색과 관심은 자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나와 새로운 소속에서 만난 사람의 공통점이나 차이를 알아가고 익숙해지기까지의 시간은 언제나 예상보다는 길다. 상대를 의식하며 몸을 사리게 되고 경계의 눈빛이 오가며 어색하다. 성격도 영향을 미치지만 나의 경우 ‘앞으로 함께 할 시간’보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때로는 ‘난 너와 달라’에 무게를 실었기 때문이다.
36년의 치열한 서울의 삶과 고단한 맞벌이 생활을 접고 이 곳, 고촌으로 왔을 때 오래된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을 무지하게 드나들었다. 전 직장은 물론 심지어 그들이 사는 동네(왕복 4시간)까지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돌아오기 전 시간을 이용해 틈만 나면 나갔다. 새로운 동네에 적응하는 불편함보다 과거의 안락과 편안함을 누렸고 그 대가로 몸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업주부’로서의 삶은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이중 노동에 대한 도피처였다. ‘전업주부’가 나의 목적은 아니었다. ‘나’에서 ‘아이’ 중심으로 정렬 기준을 바꾸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재의 삶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까지의 시간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적응을 위한 일정 시간이 흐른 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지금은 내 삶에 만족하고 심지어 사랑한다.
사랑하니 주변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로 인해 사랑의 마음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우정의 크기’는 그들과 들인 시간으로 갈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간의 양보다 ‘지금 맞닿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우화의 이야기에서 처럼 내가 당장 쓰러져도 구해줄 사람은 나와 같이 있을 누군가가 아니겠는가.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때론 살을 비비고 어루만지며 무언가를 함께하는 사람. 그래서 매일 운동을 함께하는 멤버, 독서토론으로 만나는 아줌마들, 글쓰기를 위해 만난 동기들, 우리 아이들 친구의 엄마, 배움을 목적으로 만나는 친구들, 엘리베이터에서 인사하는 이웃들, 무엇보다 가족. 소중하고 감사하다.
나의 우정은 이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안부와 일상을 나누는 (오래됐지만) 지금까지 연락의 끈을 놓지 않는 친구들은 오랜 시간을 함께해서가 아니라 '지금' 함께 하기에 좋은 것이다. 그 결과 마음이 내려졌고 편안해졌다. 소중했던 인연들은 만나기 위해 노력하게 됐다. 그러면서 연연하지 않게 됐다. 낯선 곳이 두렵지 않다. 이미 지난 ‘과거’보다는 ‘지금’, ‘앞으로 함께 할 시간’에 비중을 더 둘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