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친밀한 폭력』 (정희진, 교양인, 2016)
‘친밀함’의 그늘은 친밀도의 세기만큼 깊고 어두웠다. 제목만 ‘친밀한’ 책, 읽다가 화가 나고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찢어지는 고통을 느껴 입안에 고이는 분노(욕) 때문에 몇 번을 덮어두어야 했던 책. 차라리 소설이었다면…….
『아주 친밀한 폭력』 (정희진, 교양인, 2016)은 가정 내 남편에 의한 ‘아내 폭력’의 진실을 다룬다. ‘아내 폭력’을 겪고 있는 남편과 아내 집단의 생생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논문이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2001년)로 출간된 후, 개정판으로 나온 것이다.
이 책은 가족 내 일어나고 있는 ‘아내 폭력’에 대한 기존의 사고를 완전히 뒤엎는다. ‘아내 폭력’은 가해자 개인의 심리적,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가족’을 중시하는 사회 구조 및 문화적인 맥락에서 어떻게 폭력을 지속하고 재생산해왔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책을 덮고 시간이 흘렀다. 피해자들로부터 느낀 고통이 점차 가라앉으니, 해소되지 않은 물음이 떠오른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부부는 법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부모 자식과 형제는 피를 나눈 관계다. 그렇기에 가족은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생각이 무의식까지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뿌리 깊은 의식이 ‘가족 내 폭력은 있을 수 없는 것’이란 인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것이 남편으로부터 폭력을 당하는 아내들의 입을 막고 있었다니! 의심 없이 받아들인 기존 제도, 사회 구조, 역사가 추구해 온 가치에 대한 확고한 믿음 덕에 우리는 어느새 ‘아내 폭력’의 동조자가 돼버렸다.
한국사회에서 가족은 하나의 ‘단위(unit)’로 통용된다. ‘가족’은 사적인 공간으로 가족의 문제는 가족 내에서 해결하는 게 ‘미덕’이다. 부부간의 문제에 간섭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가족’은 하나의 단위이기 때문에 세대주(주로 남편)는 가족을 대표하여 의사 결정권을 갖는다. 폭력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도 가족 대표와 몇 마디를 주고받고는 조사는커녕 그냥 돌아간다. 신고하는 여성을 향해서는 어디 하나 부러질 정도로 맞고 와야 신고가 가능하다며 어깃장을 놓는다.
남편으로부터 폭력을 당해온 아내는 대부분 맞지 않아야 할 ‘인간의 권리’보다 ‘어머니로서의 도리’를 더 중시한다. 자녀가 대학 갈 때까지 '온전한 가족'이라는 정상적인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매를 맞아가며 버티기도 하고, 아이가 다 커서야 이혼을 결심하기도 한다. “남편의 폭력이 이혼보다 더 비교육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다.”(p.206) 가족유지를 위해 학습된 모성애의 결과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가족은 개인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되기도 하지만 고립된 사각지대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연료로서 ‘아내’의 희생(가사노동, 자녀교육, 시댁 관리, 보살핌 노동 등)은 불가피해졌다. 상대적으로 한 가정을 대표하는 남편의 권력은 커졌다. 폭력이 있더라도 가족 내 문제로 인식되어 사회와 철저히 분리되고, 남편의 권력은 지속된다. 개인의 ‘맞지 않을’ 권리보다 가족의 안녕이 최전선에 놓이게 되었다.
완벽하다고 믿는 사회적 관습이나 제도 뒤에도 반드시 그림자가 있다. 결론은 ‘아내 폭력’ 현상을 통해 가족의 성격과 기능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 연구는 가족 관계에서는 폭력이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에서는 폭력이 발생할 리가 없다’는 담론에 대한 비판이다.” (p.250)
저자는 ‘여성 평화학 연구자’라는 칭호답게 자칫 남녀 성대결로 흐를 수 있는 페미니즘을 ‘인권’ 차원에서 접근함으로써 페미니즘 운동의 필요성을 한층 더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했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고통의 내용보다 고통을 지속하고 강화하고 있는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폭력 당하는 여성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참으라는 압박을 받는다. 이것을 대를 이어 학습된 문화다. 이러한 환경에서 '인권'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이 맞는지 묻고 싶다. 우리의 인권은 안전한가. 현재 옳다고 믿고 있는 제도나 가치관에 대해 다시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