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
발단은 그림책이다. <엄마, 왜 안 와>(고정순, 웅진주니어).
한 달 전, 꿈틀 책방 이숙희 대표님이 책방에서 그림책을 읽어주셨다. 제목만 들었는데 뭔가 뒷 목이 후끈해지는 게 예사롭지 않다. 눈물이 나올 거라 미처 예상치 못한 나는 멋대로 험학하게 일그러지는 근육들을 제어하지 못했다. 내가 울 때 난 내가 얼마나 못생겨지는지를 잘 안다. 읽어주시는 분도 당황했을 것이다. 속수무책으로 흐르는 눈물에 내용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내 감정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오늘 그 책을 사 왔다. 당시엔 제대로 볼 용기도 없었다. 그 감정과 대면하고 싶지도 상기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우는 이유를 정확히 몰랐다.
이 그림책은 회사에서 늦는 엄마가 아이에게 늦는 이유를 설명하는 책이다. A4용지가 바닥에 널브러진 복사기를 들여다보며 "자꾸만 토하는 코끼리를 만났지 뭐야. 코끼리 속이 편안해질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줄래?" 라거나 빨리오라는 아이의 전화에 "잠 안 자고 울어 대는 새들이 모두 잠들면 곧 갈게"라고 답한다. 상사 같은 느낌의 큰 오리가 그려진 그림엔 이런다. "화가 잔뜩 난 꽥꽥이 오리를 만났지만 엄마가 잘 해결하고 갈게"
'워킹맘일 때 난 왜 이러지 못했을까?' 란 생각으로 눈물이 난 걸까? 물론 그런 생각도 조금 들었다. 하지만 그 당시 아이 눈높이에 맞춰 상황을 설명할 줄 아는 현명한 엄마였다면 직장을 그만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현명할 수 없었다. 건들면 폭발할 과부하 상태였다. 그때의 선택은 그러기 충분했다. 그게 아니면 그 당시 매일 나를 기다렸던 아이들이 불쌍해서? 천만의 말이다. 더 이상의 최선도 없었다. 최선을 다한 삶엔 후회가 없다.
갑자기 내가 했던 그 '일'이 그리웠다. 내가 그 일은 참 좋아했지. 그래서 운 것이다. 갑자기 든 생각이 생각보다 오래갔고 여행을 다녀와서도 지속되는 것 같다.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이 미운 것도 아니다. 지금의 생활에 생긴 여유가 나를 건강하게 만들었다. 다시 돌아갈 방법을 연구하다가 관련 대학원을 진학해볼까 생각도 했다. 남편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고 하고, 나 또한 학비 문제며 서류 준비 등이 귀찮아 접어 놓는다. 가둬둔 생각들이 그림책 하나로 빗장이 풀려 한꺼번에 후드득 떨어지더니 타협도 제대로 못해보고 다시 뒤죽박죽 쑤셔 박혔다.
아이가 조금 자라고,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지니 상대적으로 내 시간이 많아졌다. (방학이 되면 이런 생각 쏙 들어가겠지. 2개월 남았다.) 자연스러운 불안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성보단 감정과 행동이 앞서는 급한 성미 탓도 있다.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동요하는데 그럴 때 지름신 같은 게 자주 온다. 대학원과 재취업이란 것은 실증 나서 그만둔다고도 못하는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것들 아닌가. 게다가 대학원은 직구도 아닌 변화구다. 단절된 경력을 학위로 채웠다고 우겨야 하고 거기에 상대가 속아야 뽑히는 것이다. 돈도 들고 운도 들어야 한다. 몇 번을 재고하여 결정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그림책에 투영되는 내가 보기 싫어 펴보기도 겁났던 그 책, 집에 들고 와서 다시 보니 그렇게 슬펐던 그림책이 유머가 넘치는 해학이 되어있다. 이 책을 들여와 맞짱 뜨기 잘했다.
안정된 선택이란 이렇다. 짬짜면이나 반반 치킨 같은 것. 따라서 의무감과 하고 싶은 일을 반반씩 하는 것. 난 다시 '안정' 카드를 집어 들었다. 일을 선택하면 그 노력만큼 시간에 쫓기고 가족의 희생이 또 따를 것이다. 지금 당장은 불안해도, 꼭 돈을 버는 일이 아니어도, 최근 몇 년간 해 온 것처럼 책 읽고 토론하고 글 쓰는 것으로 나를 확인해야겠다. 가슴은 조금 아리지만 쑤셔 박아 놓은 것들이 지금의 안정을 역전하지 못한 걸 인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