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학부모 번아웃에 대하여
가을장마인가
열흘간의 추석 연휴에 이어 고3 학생들의 마지막 모의고사날인 오늘까지 연일 계속해서 비다.
지겹네.
수능을 한 달 앞두고 팽팽하게 당겨오는 긴장감에 날이 서기는커녕
수시 원서 접수를 마치고 나서 나도 아이도 모두 오래 입은 츄리닝 바지 마냥 축축 쳐져 있는 모양새다.
특히 나.
추석 연휴 전 고3 학부모 번아웃이 느닷없이 찾아왔다.
우리집에서 이른바 대전의 대치동이라 불리는 대형 학원 밀집 지역까지 대략 운전해서 25여분.
하지만 고3 수능 과목의 강의 시간표는 모두 저녁 7시.
강의 시간이 퇴근 정체 시간과 딱 맞물리기 때문에 보통 40여분의 여유 시간을 두고 출발하곤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난히 길이 더 밀리기 시작했다. 50여분을 운전해서야 가까스로 정차 차량들로 복잡한 학원 앞에 도착할수가 있었다.
아이는 주중에 3번, 주말에 2번 입시학원에 간다. 대부분 갈때는 내가 올때는 남편이 아이를 라이딩한다. 내신이 아닌 수능준비를, 아니 내신마저도 사교육의 도움 없는 자기주도학습이 가능한지 나는 잘 모르겠다. 우리 아이도 불가능했고, 내가 학교에서 마주친 상위권 학생들 모두 열심히 학원에 다녔다. 복잡하고 복잡한 학원의 효용성에 대한 얘기는 차치하자. 나는 지금 내가 학원 라이딩을 할수밖에 없는 현실에 처해있음을 이해받고 싶을 뿐이다. 아무튼 50분 동안 갇혀있던 차 안에서 견딜 수 없는 짜증이 북받쳐 올랐다. 끝없이 등장하는 자동차의 행렬이, 뒷좌석에 편안히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아들이, 도대체 공부를 얼마나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는 없으나 그저 습관처럼 학원으로 학원으로 라이딩만 하고 있는 이 현실이 견딜 수 없이 갑갑했다. '나 왜 이러지.. 이제 수능까지 한 달밖에 안 남았는데... 왜 이러지..' 계속해서 나를 다독이고, 다독여봐도 한번 일어난 짜증과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나를 잠식해 갔다.
그리고 다음날 이석증과 소화불량, 감기몸살.. 온갖 다양한 증상들이 나를 찾아와 포위했다.
추석 연휴가 다가왔을 때, 두려웠다.
수시 원서를 접수하고 나자 아이의 성적과 생기부가 냉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불안과 초조함으로 마음이 한없이 내려앉을 때, 또 다른 마음 한편에선 이루어질 수 없는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자라나 잠시 나를 들뜨게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불안과 초조, 그러다가 다시 기대, 그러다가 다시 불안과 초조...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달래느라 지치고 지쳐, 거의 소파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있을 나.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감으로 열흘의 추석 연휴를 보낼 나를 생각하니 끔찍했다.
추석 연휴 동안 삼일을 제외하고 아이는 매일 학원에 갔다.
수영, 마라톤, 카약, 캠핑 등 온갖 다양한 취미생활을 영위하던 남편도 마침 휴지기.
분무기처럼 하루 종일 뿌려 되는 비속에서 나는 남편과 산책로를 매일 10킬로씩 걷고 뛰고 걸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무기력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는 컴퓨터 화면의 불합격 글자를 지워내거나 끊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걸었다. 그러고 나서 맥주를 마시고 유튜브를 보고 깔깔거리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또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팔공산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공산에 갓바위라는 죄불상이 있는데 전국 수험생 학부모들의 핫플레이스라고 들었다.
'자기야, 팔공산 갓바위에 갔다 오자, 학원 일정 없는 월요일이나 화요일 어때?'
'비 예보도 있고, 연휴 때라 길 엄청 밀릴 텐데..'
내 눈치를 보며 살짝궁 반대 의견을 내던 남편을 대동하고 경산으로 떠났다. 떠나는 아침에 비는 더욱 거세어졌다. 예보상으로 경산에는 비가 오지 않으니까.. 하고 출발했지만, 갓바위 주차장에 다다를수록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계단을 높이 오를수록, 숨이 턱턱 막힐수록 경치가 그렇게 아름답다던데, 운무에 휩싸인 산자락은 그 어느 것도 곁을 내주지 않은 채 꽁꽁 몸을 숨기었다. 그래서 우리는 빗줄기를 뚫고 오직 앞만 보고 계단을 올라섰다.
사실 우리 부부는 고소공포증이 있다. 철계단의 난간을 붙잡고 겨우겨우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갈수 있었다.
드디어 갓바위에 도착.
산정상이라 그런지 빗줄기는 더욱 거세어졌다.
연휴인데도 날씨 때문인지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갓바위. 미륵보살인지 아미타불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는 부처님 앞에서 무교도인 내가 손을 모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다행히 빗줄기 때문에 아무도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고3학부모 번아웃인지, 갱년기인지 나는 도무지 요즈음의 내 마음을 어쩔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