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특성화 대학들의 자기소개서에 대하여
추석이 지나고 일주일 뒤면 카이스트 학교장추천전형 합격자 발표가 있다.
아이는 카이스트 학교장추천전형에 지원했다.
70%의 불가능과 30%의 기적같은 가능성.
사실 기대하기도 부끄럽다.
과학특성화 대학은 수시 6장 제한에 들지 않기 때문에, 카이스트부터 시작해서 유니스트 등등 무려 4장의 원서를 더 작성할 수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어머니~ 너무 많이 쓰지 마세요..지치고 힘들어요..딱 2장만 쓰세요'라고 나를 만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식한 엄마는 무조건 다다익선.
카이스트부터 시작되는 과학특성화 대학들의 입학 전형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소개서와 교사추천서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이다.
카이스트는 학교장추천전형이 아니더라도 일반전형으로 지원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여름방학때부터 슬슬 아이와 함께 자기소개서를 준비했다. 다른 과학특성화 대학들의 자기소개서는 2개의 질문으로 이루어져있는 반면에 카이스트는 3개의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고, 작성해야 되는 글자수도 다른 대학들에 비해 많았다. 우선 카이스트를 작성해놓고, 이를 바탕으로 나머지 대학들의 자기소개서를 정리하면 되겠다는 특별하지 않은 전략을 세워놨다.
물론 과학특성화 대학의 자기소개서 작성을 도와주는 여러 사교육 컨설팅 업체가 존재하기는 한다. 그런데 왠지 모를 자신감인지 나는 그들을 도무지 신뢰할수가 없었다.
진정성! 컨설팅 업체가 작성해주는 자기소개서에는 왠지 진정성이라는 부분이 결여되어 있을거라는 나만의 편견 아닌 편견이 존재했다. 그래, 아이와 함께 죽이되든 밥이되든 우선 시작해보는거야~아자~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자기소개서 작성하기에 앞서 나는 유튜브로 카이스트 자기소개서 작성법에 관련된 동영상을 몇개 찾아보았다.
동영상에서 공통적으로 제시되는 의견중에 하나가 진로를 위한 나의 노력을 써야하는 2번 문항에서 자신의 활동을 쭉 나열하듯이 쓰지 말고, 두세개만 골라서 활동을 하게된 계기, 활동내용, 활동 과정에서의 어려움, 그 어려움의 극복과정과 이 과정에서 깨달은점, 앞으로의 도전과제 등을 자세하게 서술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마침 옆자리의 선생님이 아직 자기소개서가 남아있던 재작년의 입시에서 서울대에 입학한 지인의 자녀가 쓴 자기소개서를 내개 보여주었는데, 동영상에서 컨설턴트가 말하는 내용 그대로 작성된것이 아닌가!
고등학교때에는 외부상장 하나 받아놓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초등과 중등때까지는 전국청소년과학탐구대회에서 금상도 받곤했다. 햐~이때가 우리 아들의 화양연화로구나~ 하지만 고등학교 때에는 내신과 모의고사 수행 등을 챙기느랴 과학 관련 대회를 준비한다는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사실 고등학생이 이런 과학이나 코딩 대회에 나가면 수상하기 더 쉽다. 초등은 박터지는 경쟁이지만, 중등에서 고등으로 갈수록 수상 기회는 더 넓어진다. 왜? 대부분 참여하지 않기때문에..) 생기부의 적혀있는 몇가지 활동을 추려내서 아이에게 자기소개서 2번 문항을 작성하게 했다.
아이가 가져온 자기소개서는 유튜브의 강사들이 하지말라는 나열~ 그자체였다.
'아니...아들아...이렇게 말고, 활동하면서 어려웠던점 없었어? 어려웠던점을 적고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나,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점을 배웠나 이런걸 쓰는거야'
'어려운점 없었는데....'
'어니......잘 생각해봐'
'어려운점 없었는데....'
결국 아이는 아니 우리는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봐도 도무지 좌절과 어려움과 위기를 찾아내지 못해서, 이러저러한 활동을 통해 어떠한 공학적 기술과 마인드를 키울수 있었나를 중심으로 서술했다.
나는 알고있다.
아이가 왜 어려움과 좌절과 위기를 느끼지 못했는지...
결론은 간단하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과제와 프로젝트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소위 특목고 학생들의 생기부와 자소서에 등장하는 대학 논문 수준의 실험이나 프로젝트가 아니라, 컴퓨터 공학에 관심있는 일반적인 고등학생들이 재미로 도전할수 있는 코딩이나 프로그래밍이었기 때문일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화가 나네.
아니, 일반적인 고등학생들이 중력파를 검출하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물질을 발견하는것도 아니고, 인공지능을 개발하는것도 아닌데...뭐 특별히 어려움을 느끼고, 좌절을 겪고, 위기를 극복해야한다는 말인가!
왜 그런 내용을 생기부와 자소서에 작성해야한다는 말인가! (사실 일전의 입시 컨설팅에서 컨설턴트는 '아이가 컴퓨터를 좀 다룰줄 아나 본데...이런 파이썬 프로그램 같은건 너무 평범한 내용이예요' 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일정하게 정해진 방식과 패턴으로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야한다는 입시 컨설턴트의 가스라이팅을 제외한다면,
그로인한 나의 불안과 두려움을 빼버린다면,
아이와 함께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일은 고되면서도 나름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아이도 자신의 고등 시절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정리해보는 시간이었던듯 싶다.
과학특성화 대학들에 남아있는 자기소개서에 대해 생각해본다.
우선 나는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기소개서에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여러 이유로 인한(특히 담당교사의 이해와 노력 부족, 학교나 교사들간의 편차 등) 생기부의 부실함을 자신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다만 학교 밖 대회나 경험을 제외하고 학교내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을 중심으로 작성한다면, 오히려 생기부에 주눅들어 있는 지방 일반고 학생들에게 또다른 기회가 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방 일반고 교사로서 안타까운점 하나가, 우리 학생들이 면접에도 논술에도 학생부 종합에도 너무 소극적이라는 것이다. 훌륭한 자질과 내신점수, 생기부를 가지고 있음에도(물론 이건 내생각..또 사교육 컨설턴트들은 특목고나 자사고 학생들의 생기부와 비교해서 형편없다고 가스라이팅을 해대겠지) 6교과를 안정적으로 지원하는 학생들이 수두룩하다. 그런데 이게 오히려 안정적이 아닐수도 있다. 만약에 수능 최저를 못맞춘다면 어떻게 할것인가?
입시 전형에서 뭐 하나가 추가된다고 너무 어려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한다. 자기소개서이든, 면접이든, 논술이든 뭐 하나를 추가적으로 더 함으로써 내가 지원할수 있는 대학의 레벨을 한단계 더 높일수도 있다.
유명 입시 컨설턴트의 충고를 따라야 했을수도 있다. 카이스트 자기소개서의 2번문항은 나열식으로 쓰면 안되는거고, 반드시 위기와 고난 극복의 서사가 들어가야 하는 것일수도 있다. 없는 고난의 서사를 억지로 억지로 만들어 냈어야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들은 그런 자기소개서를 쓰지 않았다. 아들은 시종일관 경쾌함과 재미를 화두로 삼았다.
그리고 나는 아들의 자기소개서가 꽤 마음에 들었다. 물론 카이스트 입학사정관들의 생각은 다를수 있겠지만.